학교 때 다들 배운 기억이 있다. 조선 선조 때 송강(松江) 정 철(鄭 澈)이 지은 '사미인곡(思美人曲)'과 속편인 '속미인곡(續美人曲)'이 우리 가사문학의 정수라고.그것이 규방 여인의 연시(戀詩)가 아닌 연군지사(戀君之詞)라는 설명을 들었을 때의 기묘한 느낌이 지금도 선연하다.
밤하늘을 올려다 보기만 해도 속절없이 눈물나고 차가운 원앙금침을 어루만지며 밤새 뒤척이는 그 기막힌 연가가 50줄을 훌쩍 넘긴 노 선비의 글이라니.
또한 그 절절한 연모의 대상이 동성(同性)의 임금이라니.
새삼 옛 노래를 상기하는 것은 최규선(崔圭善)씨가 녹취록에서 토로한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에 대한 정서가 달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추억은 늘 어제 일 같듯 그는 김 대통령의 말투 하나하나까지 생생하게 기억해낸다.
녹취록에 따르면 그는 지난 대선 직후 DJ를 만난 순간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그 때의 격려 한마디로 인해 그는 DJ를 아예 신처럼 숭배하게 된다.
이후 사우디아라비아의 알 왈리드 왕자로부터 투자를 끌어들이고 조지 소로스를 초청하는 등 신이 나 뛰어 다닐 때의 모습은 그야말로 사랑에 취해 행복해하는 여인의 모습 그대로이다.
이럴 때 "자네" 혹은 "규선이"하는 최고 권력자의 은근한 호칭은 그에게는 사랑의 확인이자 삶의 이유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러니 버림받았을 때의 심정이 어땠으리라는 것은 짐작키 어렵지 않다.
"우리 대통령이 (나를 음해하는 이들을) 과감히 무찔러 주시고 혼내 주실 것"이라는 희망마저 사라지고 스스로의 안위조차 보장받을 수 없게 됐을 때 그는 모든 것을 폭로함으로써 '연인'에게 복수하는 방법을 택한다.
사실 권력자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이가 어디 최씨 혼자 뿐이었으랴.
그가 DJ의 총애를 받던 시절 숙소로 불려 갔을 때 가신들이 던지는 빈정 반 부러움 반의 말투에서는 연적에 대한 질투심이 그대로 묻어난다.
왕조시대의 유물인 이런 '구애(求愛)형' 권력구조가 여전한 원인은 역시 제도와 시스템이 배제된 정치문화에 있다.
공식적인 직위나 직책에 관계없이 권력자와의 물리적, 정서적 거리에 의해 힘의 크기가 결정되는 한 모두들 한 줌 볕을 더 가까이 쬐려 기를 쓰고 목을 늘이는 풍토가 개선될 리 없다.
공개적인 인물 검증과정이 배제된 비선(秘線)이 발달할 수 밖에 없는 까닭이다.
요즘 무성한 제왕적 대통령제에 대한 비판도 따지고 보면 제도적인 권력 집중만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비선을 통한 자의적, 가변적 통치방식이 더 비판의 본질에 가깝다.
더구나 특별한 대가없이 운영되는 비선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 법. 원천적으로 부패할 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런 측면에서 대통령은 정말 해서는 안될 말을 했다. "이제 자네는 서열이 틀려졌네. 권력 내 위치가 틀려져 부러."
물론 최씨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대통령은 정말 해서는 안될 말을 했다.
이준희 사회부장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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