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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신화] (3)인류의 시조, 복희와 여와 남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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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신화] (3)인류의 시조, 복희와 여와 남매

입력
2002.05.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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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 속에서 하늘과 땅이 갈리고 다시 만물이 생겨나게 되면 이제 인류가 등장할 차례이다. 창조신화에서 인류는 보통 마지막에 출현한다. ‘구약’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은 하늘과 땅, 동식물을 다 만들어 놓은 후인 엿새째 되는 날 자신의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어내고 지상과 공중, 수중의 만물을 지배할 것을 명한다.중국신화에서 인류의 창조는 여와라는 여신에 의해 이루어진다. 후한(後漢) 시대에 응소(應邵)가 지은 ‘풍속통의’(風俗通義)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하늘과 땅이 처음 생겼을 때 아직 사람은 없었다.

이때 여신 여와가 황토를 뭉쳐 사람을 만들었다. 그런데 하나 하나 만들다 보니 나중에는 힘이 들어 많이 만들어 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노끈을 진흙탕 속에 담갔다가 꺼내 사방으로 흩뿌렸다. 그랬더니 흩어진 진흙이 모두 사람으로 변하였다.

이렇게 만드는 방법이 다르니 사람도 똑같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 정성껏 빚었던 것들은 귀하고 똑똑한 사람이 되었고 나중에 대충대충 진흙물로 뿌려졌던 것들은 천하고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다.

인류 창조신화에서 왜 인간은 흙으로 빚어질까. 창세기에서는 하느님이 진흙을 빚어 사람을 만들고 코에 입김을 불어 넣으니 산 사람이 되고 그리스ㆍ로마 신화에서도 프로메테우스가 대지의 흙을 강물로 반죽하여 사람을 빚어낸다.

북아메리카, 아프리카 여러 부족의 신화에도 흙으로 사람을 만든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마 이러한 공통점은 신석기 시대 무렵 인류가 처음 경험하였던 토기제작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흙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초기 인류의 경험이 흙으로 사람을 빚어낸다는 비슷한 유형의 이야기를 가능하게 하였을 것이다.

동시에 사람이 죽으면 썩어서 흙이 되는 것을 원시인류가 흔히 보고 겪으면서 사람의 원재료가 흙일 수밖에 없다는 상상도 했을 것이다.

여와 신화를 비롯한 세계 각지의 인류창조 신화들의 또다른 공통점은 인류가 신적 존재에 의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여와 신화와 계통이 다른 중국의 신화들은 인류가 자연발생적으로 태어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예컨대 ‘회남자’(淮南子)에 의하면 혼돈 속에서 두 명의 신이 나타나 하늘과 땅을 만들어 밝음과 어둠, 강한 것과 부드러운 것의 분별이 생겨나고 이들간의 상호작용에 의해 만물이 빚어졌는데 조잡한 기운은 동물이 되었고 순수한 기운은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반고로부터도 인류가 태어난다. 반고의 주검이 산과 강, 해와 달 등 중요한 자연현상으로 다 변하고 난 마지막에 그의 몸에 있던 벌레들이 바람을 맞고 사람으로 변한다.

게르만 신화에서도 거인 이미르의 몸에 돋아난 식물들이 인간이 되지만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이미르를 살해한 오딘이 물푸레 나무로 남자를, 느릅나무로 여자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중국의 인류창조신화에는 여와의 경우처럼 신에 의한 의도적인 창조와 반고의 경우처럼 자연발생의 두 가지 계통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의 바탕에 깔린 관념을 편의상 창조론과 자화론(自化論ㆍ만물이 스스로 변화한다는 주장)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중국신화도 처음에는 창조론적인 관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후대로 가면 갈수록 무위자연(無爲自然ㆍ작위하지 않고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입장)을 신념으로 한 도가(道家) 사상의 영향에 의해 자화론의 방향으로 조정된다. 왜냐하면 신화는 나중에 주로 도가계열의 서적에 의해 보존되기 때문이다.

신화의 세계에서 인류의 창조는 한번으로 완결되지 않는다. 커다란 재난에 의해 세상이 파괴되고 인류도 멸망의 지경에 빠지게 되면 세상은 복구되고 인류 역시 다시 탄생될 필요가 있다.

세상과 인류를 파멸시킬 재난으로는 가뭄과 홍수, 화재, 대살육, 질병 등 여러 가지가 있으나 이중 가장 철저한 파멸을 수반하는 것은 홍수이다. 세계 각처에는 비슷한 내용의 홍수신화가 전해지고 있다.

홍수신화의 기본 내용은 대개 홍수에 의해 세상이 휩쓸려 간 후 극소수의 인간만이 살아 남고 이들이 다시 인류를 번성시킨다는 것이다.

중국의 스촨(四川) 지역에는 다음과 같은 홍수신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태고에 두 형제가 하늘과 땅을 다스리고 있었다. 동생인 뇌공(雷公)은 하늘을, 형인 고비(高比)는 땅을 맡았다.

어느 날 뇌공이 사람이 제물을 잘못 바친 것에 화를 내 가뭄이 들게 하여, 지상의 모든 것이 말라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보다 못한 고비가 하늘의 비를 훔쳐다가 사람들을 구하였다. 이에 노한 뇌공과 고비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는데, 고비가 뇌공을 이겨 조롱 속에 그를 가두었다.

가뭄등 재앙으로 온세상 파괴 인류는 다시 탄생

고비에게는 복희와 여와라는 아들 딸 남매가 있었다. 고비는 집을 나서면서 절대로 조롱 속의 뇌공에게 물을 주지 말 것을 남매에게 당부하였다. 그러나 남매는 뇌공의 애원에 못이겨 물을 주게 되고, 뇌공은 힘을 얻어 조롱을 부수고 나왔다.

뇌공은 답례로 남매에게 이(齒)를 한 개 뽑아주고 하늘로 올라갔다. 뇌공은 우신(雨神)에게 명령하여 밤낮없이 비를 내리게 했다. 홍수가 나서 모든 사람이 물에 빠져 죽고, 산꼭대기까지 물에 잠겼다.

이때 남매는 뇌공이 주었던 이를 심었더니 순식간에 등나무로 자라서 박을 열매로 맺었다. 홍수가 밀려왔을 때 남매는 박을 파서 그 속으로 들어갔다. 남매는 박을 타고 홍수 속을 둥둥 떠다녔다.

홍수가 물러간 후 보니 아버지 고비와 모든 사람들은 죽었고, 살아남은 사람은 남매밖에 없었다. 이때 천상의 태백금성(太白金星)이 남매끼리 결혼하여 인류의 대를 잇기를 권하였다.

남매는 거부하다가 산에 올라가 각기 다른 곳에서 연기를 피워올려 두 연기가 합쳐지면 결혼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침내 두 연기가 하나로 합쳐지자, 남매는 하늘의 뜻으로 알고 결혼하여 인류를 번성시켰다.

흥미로운 것은 태초에 홀로 인류를 창조했던 여신 여와가 여기서는 복희를 오빠로 둔 남매로 출현하여 다시 인류의 창조를 담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이 신화가 앞서의 여와신화보다 뒤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즉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가 성립되면서 모계사회 시절의 독립적인 여신이었던 여와가 한 남성의 동생 혹은 배우자로 격하된 것이다.

이 신화에서 인류의 재창조는 홍수에서 살아남은 남매가 근친상간이라는 도덕적 금기를 깨뜨림으로써 달성된다. 근친상간은 인류를 보존해야 한다는 대의명분을 용납하는 하늘의 뜻에 의해 문제시되지 않는데 하늘의 뜻은 두 줄의 연기가 합쳐지는 현상으로 표현된다.

그런데 연기가 합쳐지는 것뿐만 아니라 불을 피우는 일 자체가 이미 성행위를 상징한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일찍이 인간이 나무를 비벼서 불을 얻는 방법을 성행위로부터 유추해냈을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복희ㆍ여와 같은 남매를 주인공으로 한 이른바 홍수남매혼형(洪水男妹婚型) 신화는 중국의 도처에서 이야기되고 있다.

비슷한 내용의 홍수신화는 다른 나라에도 많다. 예컨대 그리스ㆍ로마 신화에서는 홍수가 나서 모든 사람이 다 죽자 데우칼리온 부부만이 살아남고 히브리 신화에서는 방주를 탄 노아 가족만이 살아남는다. 다만 중국과 서구의 홍수신화 사이에는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우선 홍수의 동기에서 서구신화는 신의 인간에 대한 분노, 그로 인한 징벌의 성격이 짙지만 중국 신화에서는 순수한 자연재해라든가 신들끼리의 전쟁 탓 등 인간과 직접 관련이 없는 경우가 많다. 또 홍수 이후 살아남은 인간이 서구 신화의 경우 대개 부부라든가 가족 단위임에 비해 중국 신화에서는 미혼 남녀나 남매인 경우가 많다.

같은 홍수신화인데도 이러한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한 마디로 그것은 동서양의 신과 인간간의 관계에 대한 관념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감히 인간이 신을 넘볼 수 없는 관계인 서구 신화에서는 징벌과 구원은 신의 섭리에 의해 미리 다 예정되어 있다.

반면 신과 인간의 관계가 비교적 느슨하고 자연의 변화에 순응하는 관념이 우세한 중국신화에서는 생물학적 본능이 도덕적 금기를 넘어서게 된다.

험난한 장애를 딛고 결합하여 인류의 시조가 된 복희ㆍ여와 남매, 우리는 이 신화에서 사랑을 실현하고자 오늘도 분투하는 수많은 젊은 남녀의 초상을 본다.

개울가에서 만나 소나기 속에서 애틋한 사랑을 키워나갔던 저 무구(無垢)한 소년 소녀, 그들이야말로 홍수 속의 연인 복희ㆍ여와 남매의 진정한 후예가 아니었던가.

■복희·여와 남매

중국에서는 고대부터 복희ㆍ여와 남매를 민족의 시조로서 숭배해 왔다. 한(漢) 나라 때의 돌에 새긴 그림이라든가 당(唐) 나라 때의 채색한 비단 그림 등에는 복희ㆍ여와 남매가 결합하고 있는 모습이 자주 출현한다.

이들 그림에서는 복희ㆍ여와가 상반신은 인간, 하반신은 뱀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홍수남매혼형 신화는 중국에서뿐만 아니라 한국의 함흥 지역에서도 수집된 바가 있다. 사랑하는 누이와 맺어질 수 없어 죽음을 선택하는 오빠의 이야기인 달래고개 전설은 이 신화의 변형이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도 해와 달을 각기 머리에 인, 복희와 여와로 추정되는 신화적 인물이 등장한다.

당나라 때 그려진 복희ㆍ여와도. 신장(新疆) 위구르자치구 박물관 소장.

글=정재서(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그림=서용선(서울대 서양화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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