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오늘 ‘향수’의 시인 정지용(1902~?)이 태어났다. 그 해는 ‘진달래꽃’의 시인 김소월(1902~1934)이 태어난 해이기도 했다.한국현대시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두 시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김윤식 명지대 석좌교수의 특별 기고를 게재한다.
소월은 김소월이요 지용은 정지용이지만 김소월, 정지용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냥 소월이고 지용이다.
보통명사로 우리에게 인식되었음을 새삼 말해준다. 그렇다면 이렇게 부르는 우리란 누구인가. 감히 국민이나 민족이라 말할 수는 없겠다.
겨우 우리 문학, 그 중에서도 시가(詩歌)를 아끼는 무리의 지칭어 정도이리라. 그렇기는 하나, 그 문학이나 시가가 한국어로 되어 있음에 주목한다면 어떠할까.
국민도 민족도 모두 한국어를 사용하고 있다면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국민으로도 민족으로도 확대된다.
탄생 100주년을 맞는 이 두 시인은 한국어를 가장 소중하게 갈고 닦았다는 점에서는 한치의 어긋남이 없다.
평북 정주에서 나고 오산과 서울에서 배운 소월은 시집 ‘진달래꽃’(1925) 한 권을 남기고 저다병(楮多病)으로 죽었다.
충북 옥천에서 태중 교인으로 나고 일본의 미션계 도시샤(同志社)대학에서 배우고, ‘정지용 시집’(1935) ‘백록담’(1941)을 남긴 지용은 6ㆍ25의 비극 속에서 죽었다.
나고 살고 남긴 것은 물론 죽음의 방식 또한 다르듯, 이들이 한국어를 갈고 닦음의 방식에 있어서도 각각 달랐다.
소월의 경우는 어떠했던가. 그는 이 나라 언어의 울림에 누구보다 민감했다. 무엇에 대한 울림인가.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엄마야 누나야’ 부분)고 했다. 강변에 살지 않기 때문이다. 있어야 할 것이 없는 상태, 이를 상실감이라 한다면 이에 대한 울림이 아닐 수 없다.
국가 상실 곧 하늘 개념, 부(父) 개념, 공(公) 개념의 상실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그리움은 여러 가지 형태로 읊을 수 있겠지만, 이를 ‘울림’의 범주로 읊어내기야말로 소월시의 본질이다.
상실감에 대한 이 울림이 드디어 혼(魂)의 울림에로 향할 수조차 있었다. ‘초혼’이 절창인 까닭은 여기에서 온다.
울림이 시가의 한쪽 기둥이라면 다른 한쪽은 무엇일까. 보여주기와 드러내기의 선명함이 아닐 수 없다.
우리말이 할 수 있는 ‘보여주기’의 어떠함을 갈고 닦아, 거울처럼 투명하게 만듦으로써 전례없는 마당을 연 쪽이 지용시다.
‘해발 5천피트 권운층 우에/ 그싯는 성냥불!’이라든가 ‘연정은 그림자 마자 벗쟈/ 산드랗게 얼어라! 귀뜨람이 처럼’(‘비로봉’ 부분) 등에서 보듯 거의 완전한 그림 한 폭이다.
우리말이 이처럼 투명하게 사용된 바는 일찍이 없었다. 소월시와는 달리 지용시란 설명할 수는 있어도 해석할 수 없다 함은 이 때문이다.
대낮처럼 밝기에 도무지 그림자가 없다. ‘나의 청춘은 나의 조국’(‘해협’ 부분)의 아픔 속에서 연마된 ‘기술’이기에 소중함이 더하다.
시가란 무엇이뇨. 한쪽 기둥이 울림이라면 다른 기둥이 투명성이다. 이 둘을 각각 대표하는 소월시, 지용시는 그 자체가 전범이다. 두 시인의 탄생 100주기의 의의의 각별함은 이에서 말미암는다.
/김윤식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