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8월 이란의 한 국제항. 직물로 위장된 무수초산(無水醋酸) 50톤이 화물선에 실려 인천항을 빠져나간 뒤 인도양을 거쳐 이 항구에 도착했다. 무수초산은 모르핀을 대표적인 마약류인 헤로인으로 만드는데 필수적인 화학물질.이 화물선은 이 항구를 거쳐 헤로인 생산국인 아프가니스탄으로 가려다 이란정부에 적발됐다. 이에 따라 헤로인 250톤을 만드려던 국제마약조직의 꿈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국제사회의 곱지 않은 시선이 우리나라에 쏠리기 시작했다.
■ '코리아=마약원료 헤이븐’
마약완제품에 이어 이번에는 마약원료물질(precursor chemical)이 국내로 몰려들고 있다. 우리나라가 마약생산국이 아니어서 국제적인 감시망에서 벗어나 있는 점을 악용, 국제 마약조직이 한국을 마약원료물질 경유지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검찰과 미국의 마약단속국(DEA)은 1999년부터 지난해까지 한국을 거쳐간 무수초산과 과망간산칼륨은 각각 200톤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DEA 서울지부 관계자는 “200톤은 공식적인 수출입량에 기초한 것이며 위장된 것을 포함하면 1,000톤을 상회할 것”이라며 “원료물질로 평균 5배의 해당마약을 제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산술적으로 수천톤의 헤로인과 코카인이 생산될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연간 소비되는 히로뽕이 120만톤 정도인 점을 감안하면 이 원료로 엄청난 규모의 마약을 만들 수 있는 셈이다.
■ 종착지는 아프간, 콜롬비아 등
마약당국은 특히 중국 북동부 지역에서 만들어진 원료물질이 부산항 등을 통해 아프간, 콜롬비아 등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마약원료물질은 유엔이 국제협약을 통해 23개종을 지정하고 있으며 이중 헤로인과 관련된 무수초산과 코카인 정제물질인 과망간산칼륨이 주 감시 대상이다.
대검 관계자는 “국제 마약조직이 원료물질이 화학제품 이나 향신료의 원료로도 사용돼 국가간 이동이 자유로운 점을 이용, 부산, 인천항을 수출경유지로 활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2000년 3월에는 파키스탄인이 수출원단으로 위장한 무수초산 7톤을 아프카니스탄으로 보내려다 서울지검에 적발돼 기소됐고, 99년 7월에도 콜롬비아 마약카르텔이 한국내 무역회사를 통해 과망간산칼륨 22톤을 위장 밀수출하다 적발됐다.
DEA는 2000년 9, 10월과 지난해 3월 모두 35톤의 중국산 무수초산이 한국을 거쳐 이란으로 빠져나갔다고 식약청에 통보해왔다.
■ 앉아서 당하는 꼴
그러나 국내법규가 미비한데다 단속 인력ㆍ예산 부족 등으로 단속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해 국제사회가 한국을 원료물질 수출국으로 오인하는 사태까지 빚어지고 있다.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 등에 따르면 마약원료물질을 일정량 이상 수출입할 때는 장부에 기재토록 하고 불법사용할 목적임을 알 경우 당국에 신고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나 자료제출 요구권 등 적극적인 조사권한이 보장돼있지 않아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따라 불법거래자들은 대다수가 관세법 위반 혐의로 처벌되고 있다.
식약청 관계자는 “원료물질의 불법거래사실을 미국 등으로부터 통보받고서야 부랴부랴 세관에 연락해 조사하고 있는 실정”이라며 “법 개정과 인력ㆍ예산 충원 없이는 국제사회의 비난을 감수할 수 밖에 없다”고 털어놓았다.
손석민기자
herm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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