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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다시본다] <9>제2부(2)제왕인가 수장인가, 대통령의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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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다시본다] <9>제2부(2)제왕인가 수장인가, 대통령의 리더십

입력
2002.05.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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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은 세계 도처에서 논란을 일으켰다. 미국 대통령의 일거수 일투족은 이처럼 미국 국민은 물론 세계인의 관심의 대상이다. 유일 초강대국인 미국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고 대통령의 역할은 그만큼 중요해졌다.그러나 ‘악의 축’은 부시의 즉흥적 발언이 아니라 외교전략에 대한 미 정부 내의 체계적인 검토 결과를 대변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과 냉전 베트남전을 거치면서 미국 대통령의 권한은 강화돼 왔다.

그런데 역사를 통틀어 볼 때 미국에서 ‘강한 대통령’은 오히혀 예외적인 경우에 속한다. 70년대말 이른바 ‘의회의 복권’ 이후에는 다시 권력에 갖가지 제약이 가해지고 있다.

2세기 전 미국이 대통령제를 처음 채택했을 때 대통령은 별로 강력한 존재가 되지 못했다. 자유를 찾아 신대륙에 왔던 미국인들은 유럽의 전제군주와 같은 독재자가 되지 않도록 대통령 권한을 제한했다.

미 헌법의 이상은 ‘강한 의회, 약한 대통령’이었던 것이다. 한국의 대통령은 독점적 인사권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자가 됐지만 미국 대통령에게는 독립된 인사권이 없다.

백악권 요직, 내각의 요직, 군사령관 임명에 이르기까지 상원의 인준을 받아야 한다. 1860년대 앤드류 존슨 대통령은 국방장관을 해임했다는 이유로 탄핵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독립된 인사권 없어

대통령은 연방정부 수반일 뿐이며, 외교와 국방을 제외한 대부분의 업무는 주정부와 지방정부 소관이다. 대외정책에서마저 제도상 권력은 분산돼 있다.

헌법학자 에드윈 코윈은 “미 헌법 자체가 외교특권을 다투도록 만드는 ‘투쟁에의 초대(Invitation to Struggle)’라고 지적했다. 가령 대통령에게 군최고사령관 자리를 주면서 선전포고권은 의회에게 부여한 것이 이 같은 권력분산에 해당한다.

제임스 바버는 70년대 ‘대통령의 성격’이라는 저서에서 “대통령의 정책 결정은 언제나 합리적인 인간의 계산과 정서적인 인간의 감정이 결합된 결과물”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정치가 유럽 등에 비해 대통령의 개성이라는 우연성에 좌우될 확률이 상대적으로 높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방대한 참모진 및 자문기구는 점차 정서적인 감정에 따른 정책 결정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닉슨 권한 비판받기도

백악관의 기능이 대폭 확대되고 정책결정의 중심이 된 것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당시인 1939년 대통령 사무국(Executive Office of the President, EOP)이 창설되면서부터다. ‘현대적 대통령제(Modern Presidency)’의 출범이다.

33년 그가 취임했을 때 미국은 대공황으로 큰 혼란에 빠져 있었지만 백악관에는 대통령을 보좌할 수 있는 자리가 열 개도 안 되었다. 20세기 초까지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전화를 직접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2차 대전에 참전하면서 대통령의 역할은 더욱 커졌으며 이를 제도화하기 위해 백악관 내에 국가안보회의와 경제자문회의를 설치했다. 군 출신인 아이젠하워는 백악관 조직을 군대식 참모조직처럼 고도로 전문화하고 체계화하여 대통령의 개입 없이도 정부가 운영될 수 있게 했고 그 후 큰 변동없이 계승되고 있다.

월남전을 겪으면서 대통령 권한은 논란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고 닉슨에 이르러서는 백악관이 ‘옥상옥’으로서 행정부를 통제하여 ‘제왕적 대통령(Imperial Presidency)’이라는 비판을 받게 됐다.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에는 대통령의 권력을 제한하는 입법조치가 잇따라 취해졌으며 이런 와중에 취임한 카터는 비서실장 없이 스스로 국정자료를 검토하고 참모진의 건의 사항을 종합검토하는 등 대조적인 리더십을 추구했지만 실패한 대통령이 되고 말았다.

사회가 단순하고 정부의 역할이 적었을 때는 성격, 도덕성 등 단순한 자질만이 중요했을지 모르나 현대와 같이 고도로 전문화 다원화 정보화 세계화된 시대에는, 최고의 인재를 백악관과 행정부에 포진하고 전체가 하나의 팀으로서 국정과제를 체계적 효과적으로 추진할 수 있도록 하는 조직관리 능력과 경영 능력이 대통령 리더십 성패의 관건이 되었다.

미국 국립문서보관소나 대통령 기념도서관들을 가면 미국 대통령의 업무가 얼마나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는가 분명히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한반도 정책은 주한 미국대사관, 주한미군, 각급 정보기관들의 보고와 싱크탱크들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사무국이 중심이 되어 국무부, 국방부 등과 체계적인 분석 검토를 거쳐 대통령에게 건의되고 시행됨을 알 수 있다.

▼무소불위 자리가 아니다

체계적인 국가경영은 선거 과정에서 시작된다. 본 선거는 물론 당내 예비 선거에서부터 후보의 공약은 당선 후 곧바로 실천에 옮겨질 수 있을 정도로 구체적인 프로그램으로 짜여져 언론과 국민의 검증을 거친다.

행정 각 부처와 백악관 요직은 공약된 정책수행에 적합한 행정경험과 전문성을 겸비한 인재들로 구성되어 4년 간 그 팀이 유지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정책결정에서부터 집행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이고 전문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4년은 국가경영차원에서 보면 너무 짧다. 그리고 대통령 선거과정의 치열한 경쟁으로 국론이 분열되고 그것이 대통령 취임 후에도 부담으로 작용할 우려가 있다. 따라서 대통령제하에서 정치안정과 역사의 계승발전이 중요한 과제가 된다. 미국 대통령은 입헌군주국가의 왕의 역할인 국민통합을 위해 애쓴다.

국가위기 시에는 대통령의 권한이 확대됐다. 남북전쟁 당시 링컨은 개인의 자유제한 등 헌법과 법률을 초월하는 조치를 내렸다. 루즈벨트는 일본계 주민을 강제수용하고 전쟁을 위해 인력과 자원을 총동원하는 등 초헌법적, 초법률적 조치를 취했다. 9ㆍ11 테러 이후 부시 대통령이 취한 조치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현상으로 파악돼야 한다.

도리어 현재 미국 정치의 흐름은 외교정책에서마저 의회가 자기주장을 강화하는 입법국가로의 회귀다. 정치사회학자 로버트 푸트남은 미국의 대통령은 국내와 국제 무대 쌍방의 협상테이블에서 절충안(Win Set)을 마련해야 하는 2차원(Two Level) 게임을 벌여야 하는 운명이라고 지적했다.

더욱이 90년대 중반이후 미 의회도 분권화하고 의회 주도권 다툼을 위한 당파성이 강화하면서 대통령에게 요구되는 것은 대 의회 조정능력이다. 매파와 온건파, 이념지향과 현실외교파가 혼재해 있는 부시 정부 하에서는 대통령의 행정부 내 조정력도 중시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정책의 수반, 제왕적 대통령을 거친 후 포스트 모던 대통령제의 모습은 조정자로서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경우든 미국의 대통령은 대권의 자리, 무소불위의 자리가 아니다. 한국 대통령제가 위기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 제도적인 틀 속에서의 대통령이라는 개념은 도리어 교훈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김충남(金忠男ㆍ하와이대학 동서문화센터 연구위원)

■아메리카 핸드북 / 백악관 마피아와 NSC

미국에서도 권력은 대통령과의 거리에 따라 결정되는 게 일반적이다. 대통령이 백악관 측근과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중시하면 장관들은 허수아비가 된다. 가령 지미 카터 집권 시절 NSC와 대립했던 사이러스 밴스 국무부장관은 1980년 4월 이란 인질 구출작전이 실패로 끝날 때까지 경과를 잘 몰랐다.

45년 취임한 트루먼 대통령은 개인 참모가 없어 내각을 중시했다. 따라서 딘 애치슨 국무부장관이 권력을 장악했고 국무부는 전성기를 누렸다. 아이젠하워는 내각을 중시한 마지막 대통령으로 불리지만 내정은 셔먼 애덤스 수석보좌관에 일임해 ‘애덤스 정권’이라는 비아냥을 들었다.

케네디는 취임 초 피그스만 작전의 실패 때문에 관료를 불신하고 대신 디오도어 소렌슨, 맥조지 번디 보좌관과 아더 슐레진저 국무부장관 등 하버드 인맥을 썼다. 백악관 마피아의 시작이다. 존슨 시절에는 로버트 맥나마라 장관이 중용돼 국방부가 전성기를 맞는다. 대신 베트남전의 수렁에 깊이 빠져드는 부산물을 얻었다.

닉슨은 주지사 시절 캘리포니아 마피아를 브레인이 아닌 가신처럼 부렸다. 당시는 각의도 거의 열리지 않아 로저스 국무부장관은 캄보디아 침공작전을 몰랐다. 카터 정권의 해밀튼 조던, 조디 파월 보좌관 등 조지아 마피아는 ‘백악관 개혁’을 부르짖었으나 기행만 거듭했다.

레이건은 두번째 캘리포니아 마피아를 기용했지만 내각에도 골고루 신임을 부여하는 회장형 대통령이었다. NSC는 상대적으로 비중이 낮아져 안보보좌관이 4번이나 바뀌었고 로버트 맥팔레인 보좌관의 경우 이란콘트라 사건의 내막을 잘 몰랐다.

클린턴은 부르스 린지 인사보좌관 등 아칸소 마피아와 앤서니 레이크, 새뮤얼 버거 안보보좌관 등을 중용했지만 내각에 권력을 분산했다. 조지 W 부시의 백악관에도 앤드류 카드 비서실장 등 철의 삼각지대로 불리는 텍사스 마피아가 있지만 NSC 직원을 3분의 1이나 감축하고 부통령, 국방ㆍ국무부장관에 권한을 위임하고 있다.

그러나 국무ㆍ국방부의 알력이 종종 노출된다.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부장관은 포드 정권 시절 키신저 국무부장관과도 대립한 적이 있다.

유승우기자

swy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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