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교수는 학회장으로부터 간절한 호소를 담은 e-메일을 받았다.“학회지에 기고를 꼭 부탁드립니다. 지금의 투고량으로는 1년에 두 번 내기도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단호하게 답신했다.
“절대 원고를 내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애써 만든 논문을 SCI에 들어가지도 않는 국내 학회지에 왜 냅니까.”
SCI가 국내 학회지의 운명을 가르고 있다. SCI(Science Citation Index)는 미국의 민간 정보서비스기관인 ISI가 선정한 과학 인용 색인으로, SCI에 등재된 학술지는 어느 정도 국제 수준에 이른 학술지로 평가받는다.
최근 SCI학술지에 얼마나 많은 논문을 싣느냐가 교수의 임용, 승진과 업적평가, 연구비 지원등에 절대적인 요소로 작용하면서 SCI에 등재되지 않은 국내 유수 학술지들이 고사위기에 몰리고 있다.
대한수학회의 경우 투고 논문 수 부족으로 현재 1년에 6번인 발간 횟수를 4번으로 줄일 것을 심각하게 검토 중이다.
학회장인 정동명 서강대 수학과 교수는 “2~3년 전에는 기고량이 넘쳐서 1년은 기다려야 실릴 수 있었다. 지금은 국내 필자만으로는 원고가 부족해 일본, 중국 등에 호소하는 형편”이라고 말했다.
학회지 한 회 발간에 필요한 10~15편의 논문 중 절반 이상이 외국 교수들의 것이다. 올 초 발간된 한국 기상학회지 특별판에서도 20여편의 논문 중 한국 교수의 이름은 단 두 명밖에 찾을 수 없었다.
SCI보다 한 단계 낮은 SCIE에 등재되어 있는 한국 화학공학회지 발간도 역시 어려운 상황이다.
학술지 편집장을 맡고 있는 문성흡 서울대 화학공학과 교수는 “이른바 명문대학에서는 SCIE 등재 학술지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인정에 호소해서’ 원고를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밝혔다.
반면 올초 SCI에 등재된 생화학ㆍ분자생물학회의 학회지에는 논문이 평소보다 두 배 이상으로 늘어 발간횟수를 연간 4회에서 6회로 늘릴 계획을 세우는 등, SCI가 학회의 희비를 가르고 있는 실정이다.
이처럼 SCI에 대한 학계의 관심과 비중이 커지면서 SCI 등재 논문 수는 양적인 면에서 일취월장하고 있다.
과학기술부에 따르면 SCI논문 수가 2000년 1만 2,013편에서 지난해에는 14,162편으로 전년 대비 2단계 상승한 세계 14위로 나타났다.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증가율이다. 서울대 화학공학부의 경우 2001년에는 1997~1999년까지의 평균 논문 수보다 두 배가 증가, 교수 1인당 5.6편을 발표했다.
벤치마킹 대상으로 설정한 미국 MIT나 미네소타 대학원보다 오히려 높은 수치이다.
그러나 대부분 학회에서는 “과연 그렇다고 우리가 MIT나 미네소타 수준에 이르렀는가”라는 회의의 목소리가 더 짙다.
기상학회의 한 관계자는 “70~80년대만 해도 훌륭한 논문이 많아 외국 학술지에서도 자주 인용되곤 했다.
그 때에 비하면 지금 국내 학회지는 도저히 ‘볼 것이 없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각 학문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는 SCI위주의 획일적 지원책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서울대 문상흡 교수는 “자연과학 위주인 SCI를 공과대학에도 강제하는 게 문제다. 공과대학은 국내 학술지에 실용적이고 좋은 논문을 많이 실어 우리나라 산업진흥에 기여해야 하는데 전혀 그 역할을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현재 SCI에 등재된 국내 영문학술지는 한국물리학회지, 대한화학회보 등 6개에 불과하다.
정동명 교수는 “일정수준 이상의 국내 학술지에 대해서도 권위를 인정해 주고 논문 게재를 장려해야 한다. 이런 보완책이 없는 한 국내 학술지, 나아가 학회 자체가 고사 위기를 맞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양은경기자 k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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