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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후보 탐구 / 이회창(중)정치역정과 성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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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후보 탐구 / 이회창(중)정치역정과 성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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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5.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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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기회로 치면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후보는 운이 좋은 편이다. 법조인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한 6년 동안 정치적 포용력, 비전, 리더십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았지만 두 번이나 내리 제1당의 대통령 후보가 됐다. 어느 누구도 갖지 못한 기회다.그는 지역, 돈, 가신 등 우리 정치를 지배해온 자산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판사, 감사원장, 총리를 거치며 쌓은 ‘대쪽’ 이미지 하나로 ‘정치인 이회창’으로 뿌리내리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순풍만큼 역풍도 거셌다.

첫 대권도전에 실패한 뒤 불어 닥친 총풍ㆍ세풍으로 동생이 구속되는 등 정치위기를 겪었다. 이 과정에서 리더십, 포용력의 한계 등 정치인으로서 듣기 힘든 비판도 자초했다. 두 아들의 병역면제 의혹에다 최근에는 빌라파문 등 사적인 문제가 구설수에 오르면서 지지도에 큰 상처를 입기도 했다. .

▦소신 있던 판사에서 정치인으로

그를 정치로 이끈 인물은 지금도 애증이 교차하는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이다. YS는 1993년 2월 문민정부의 개혁을 상징할 인물로 이 후보를 지목, 일면식도 없는 그에게 감사원장을 권했다.

대법원장 0순위로 꼽히던 대법관 이회창은 이틀간의 고민 끝에 이를 수락했다. 대법원장이 꿈이던 대쪽판사가 훗날 정치인으로 변신하는 출발점이다.

이 후보는 10개월 만에 총리로 옮기는 등 외견상 승승장구 했다. 영전이었으나 임기가 보장된 감사원장으로 독립성을 고집하는 이 후보를 견제하기위한 발탁이란 설도 없지 않았다. 사실 YS와의 관계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93년 여름 YS가 대법원장에 자신이 아닌 윤관(尹?) 대법관을 지명하자 그날 밤 출입 기자들과 통음하며 “대법원 개혁은 물 건너갔다. YS가 무슨 개혁을 한다는 말이냐”고 불만을 쏟아낸 것도 한 예다.

두 사람의 갈등은 이 후보가 재임 127일만에 총리직을 전격 사퇴하면서 정점에 달했다. 사퇴과정은 법조인시절부터 원칙을 중시해온 그의 면모를 그대로 보여준다. 이 후보는 당시 통일부총리가 의장인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에서 총리인 자신에게 보고를 생략하고 연이어 회의내용을 발표한 것에 제동을 걸었다.

이에 청와대가 “외교 안보는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라며 발끈했고 “법에 있는 권한도 행사하지 못하는 총리라면 그만두는 게 났다”며 사퇴했다. 이흥주(李興柱) 전 총리비서실장은 “당시 이 후보에 쏟아진 동정여론은 정치입문의 밑거름이 됐다”고 평가했다.

실제 이 후보는 변호사로 돌아갔지만 95년 여야 모두로부터 서울시장 출마제의를 받을 만큼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다. 결국 그는 96년 여당인 신한국당 선대위원장으로 입당, 정치인으로 변신하며 4월 총선을 승리로 이끌었다. 가장 강력한 여당의 대선주자라는 평가에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정치 입문 이후의 영욕

정계입문 1년 반도 안된 97년 7월, 선거를 5개월 여 앞두고 그는 50%가 넘는 국민지지에 힘입어 여당 대선후보가 됐다. 그러나 두 아들의 병역면제의혹이란 악재가 터졌고 지지도는 한 달 만에 12%대로 급락했다. 당내경선에서 2위를 한 이인제(李仁濟) 의원이 탈당했고 YS까지 탈당했다. 그는 결국 39만 표 차이로 국민회의 김대중(金大中) 후보에게 패배했다. 여당 후보로 최초의 낙선자가 됐다.

이 후보는 패배 뒤 잠행하다 8개월여 만에 한나라당 총재로 복귀, 재기에 착수했다. 그러나 총재로 당선된 바로 그날 밤 세풍 수사착수가 발표됐고 그 해 12월 동생 이회성(李會晟)씨가 구속되는 등 이른바 ‘총풍ㆍ세풍’ 의 집중타를 맞았다. 자존심 센 그는 세풍과 관련해 두 번이나 대국민 사과를 해야 했다.

이 후보는 “정치입문이후 제일 힘들었을 때가 그때”라고 하지만 위기는 바로 기회였다. 그는 총풍ㆍ세풍을 ‘이회창 죽이기’로 맞받아치며 정치력을 키웠다. 장외투쟁과 국회농성 등 과거 야당의 투쟁방식을 고수하며 버텼고 때마침 터진 옷 로비 파문 등 여권의 악재를 딛고 야당총재의 위상을 굳혔다.

이 후보가 당을 확실히 장악하고 개혁적 이미지까지 어느 정도 만회한 것은 16대 총선을 앞두고 단행한 2ㆍ18 공천 개혁이었다. 그는 자신의 후견인이던 김윤환(金潤煥)씨는 물론 이기택(李基澤)씨 등 당권, 대권을 위협할만한 계파 보스나 잠재적 라이벌까지 가차없이 정치개혁을 명분으로 공천에서 배제했다.

총선연대의 낙선운동을 활용한 그의 ‘도박’은 4월 과반수에 불과 4석 모자라는 133석을 얻는 압승으로 대성공이었다. ‘이회창 대세론’의 개막이었다.

이후 반DJ 정서에 편승한 거품 인기라는 혹평도 없지 않았지만 대세론은 2년 가까이 요지부동이었다. 제2의 전성기다. 지난해 10월에는 3곳의 재보선까지 승리, 옷 로비 파문이후 하향세로 접어든 DJ정부로부터 정국주도권을 빼앗았다. DJ연착륙을 얘기할 만큼 대선승리의 기대도 커졌다.

그러나 올들어 상황이 급변했다. 대세론에 안주하며 느긋해 하는 사이 제왕적 총재론 시비가 터져 나왔고 끝내 박근혜(朴槿惠) 의원의 탈당 등 당 내분이 터졌다. 빌라파문까지 겹쳐 총풍 세풍에 이은 제2의 정치위기였다.

이 후보는 결국 집단지도체제를 도입하며 총재직을 사퇴하는 배수진을 쳤다. 당내 경선과 잇따라 터지는 권력형 비리의혹은 그에게 또 한번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성향과 포용력의 문제

정치인 이회창을 평가할 때 가장 뜨거운 이슈는 포용력 문제다. 원칙을 중시한다는 그의 성향이 가신정치, 금권정치, 지역주의, 나눠먹기 등 구태를 상당부분 청산했다고 평가하는 측조차 이 대목에선 수세적이다.

가깝게는 지난 2월 박근혜 의원의 탈당과 비주류 김덕룡(金德龍) 의원과의 불화가 대표적이다. 이 후보는 당초 이들이 요구한 당내 민주화를 거부하다 뒤늦게 집단지도체제 도입 등 백기를 들었지만 시기도 놓쳤고 이들과의 인간적 관계회복에도 실패했다.

비판론자는 97년 그와 당내 대선경선에 나섰던 이인제(李仁濟) 이홍구(李洪九) 이한동(李漢東) 이수성(李壽成) 박찬종(朴燦鍾)씨 등의 탈당은 물론 YS와의 끊임없는 불화, 당내 개혁세력과의 갈등 등도 포용력 부족의 또 다른 사례로 든다.

16대 공천과 관련, 정치적 후견인이었던 김윤환씨를 낙천시킨 것을 거론하는 이도 없지 않다. “속이 좁다”, “차갑다”는 정치권의 평가도 이와 무관하지않다.

이동국기자

east@hk.co.kr

■이회창 정치일지

1981 대법원 판사

1986 재임용 탈락 변호사 개업

1988 대법관

1988 중앙선관위원장

1989 동해 국회의원 재선거 타락상을 고발하며 선관위원장 사퇴.

1993. 3 감사원장

1993. 12 국무총리

1994. 총리의 법적 문제로 YS와 갈등 빚은 뒤 전격 사퇴

1995 지방선거에서 여야의 서울시장 출마 제의 거절

1996. 2 신한국당 선대 위원장으로 입당

1996. 4 15대 신한국당 전국구 1번으로 원내 진입

(하순봉 서상목 등 8인방 체제 가동하며 물밑 대권준비)

1997. 3 신한국당 대표 취임 (한보사태로 인한 YS의 수세국면 탈피용)

1997. 7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 당선

1997.8~11 아들 병역면제 의혹, 이인제 탈당 등 지지도 급락

1997. 11 조순ㆍ이기택이 이끌던 민주당과 합당, 한나라당으로 당명 변경

1997. 12 39만표 차이로 대통령 낙선. 명예총재로 2선 후퇴

1998. 8 조기경선에서 55.7%로 한나라당 총재 취임

1998.8~ 99. 9 총풍 세풍.(99년 12월 세풍 연루 혐의로 동생 이회성

구속 등 최대 위기 직면했으나 야당탄압 및 ‘이회창 죽이기’

로 몰며 버팀)

1999. 6 서울 송파 갑 국회의원 재선거 당선으로 위기 수습.

1199.9 세풍 관련 두 번째 대국민사과

2000. 2 김윤환 이기택 등 계파 보스들을 공천에서 배제, 당 완전 장악

2000. 4 133석 의석의 총선 압승으로 이회창 대세론 시작

2000. 5 당 총재 재선출

2001. 10 DJP 공조 붕괴와 재보선 3곳 승리로 정국 주도권 장악

2001. 12 교원정년 연장안 처리 시도 유보 등 제1당 행보 논란

2002. 2 박근혜 의원 탈당으로 제왕적 총재론 시비 등 당 내홍

2002.4 총재직 사퇴 및 집단지도체제 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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