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나라 국민에 값어치가 주어진다면 우리 한국인의 값어치는 얼마나 될까?미국인과 러시아인과 일본인 사이에 한국인이 서면 우리의 상대적 값어치는 어떤 수준으로 매겨질까?
이런 졸렬한 생각을 해 본다. 과연 졸렬하다.
국민이기 이전에 인간이고 또 나라마다 문화와 가치관이 다른데 어떻게 값어치를 운운할 수가 있는가? 인간은 가치를 넘어서 존재하지 않는가?
물론 원칙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그런 반론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미 무수히 그런 질문을 해 보았다. 어딘가에 질문의 현실성이 숨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졸렬한 생각은 또 졸렬한 생각을 불러온다. 나는 민족의 한 구성원이 다른 구성원을 미워하고, 비판하고, 벌하는 제가끔의 방식에서 그 값어치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를테면 한 이스라엘인이 다른 이스라엘인의 무지함을 비난하는 방식에서, 한 로마인이 다른 로마인의 불공정을 규탄하는 방식에서, 한 중국인이 다른 중국인의 비위를 응징하는 방식에서 각 민족의 값어치가 자동으로 계산이 되어 나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인간은 부정적, 갈등적 관계 방식을 경유하면서 비로소 집단적 자아의 밑바닥을 드러내는 것 같다.
평상의 관계 속에서는 그 밑바닥이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상호 호의적인 질서 속에 있을 때야 누군들 인간의 두터운 측면에 기대여 말하고 행동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싸움이 벌어지면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밑천을 드러낸다. 그 밑천이란 다름 아닌 자기 이해다.
그리고 바로 그 자기 이해가 동시에 우리 이해이고 한 민족이 열방(列邦) 가운데에서 확보하는 객관적 이해이기도 하다는 생각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하여 갖는 이해 밖에 달리 남이 우리에 대하여 갖는 이해가 없다고 나는 본다.
그러므로 우리가 화가 나서 누군가에게 막말을 할 때, 우리는 막말 이상의 행위를 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남의 잘못을 드러낸다고 막말을 하지만 사실 그 막말을 통하여 자신을 포함한 훨씬 저변의 '우리'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너와 내가 명백히 구별되어 있는 것 같지만 나의 본질을 한 길만 파고 내려가면 우리는 금새 그런 식으로 구분되지 않는 우리라는 실체를 만날 수 있다.
'나'의 훨씬 많은 부분, 훨씬 근본적인 부분은 다름 아닌 우리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이제 그 '우리'가 이 시대의 만연된 허물과 불완전성에 이어져 있음을 생각해보자. 그 점을 인식한다면 어느 누가 쉽게 남을 비난하겠는가.
나도 거기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우리의 태도는 일 차원적인 비난보다는 한 차원 높은 무엇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한 차원 높은 태도를 규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말하자면 이 여자를 돌로 쳐죽여야 한다고 흥분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비해 누구든지 죄없는 자가 이 여자에게 첫 번째 돌을 던지라는 말을 듣고 돌아서는 사람들의 태도와 그 마음은 훨씬 규정하기가 어려운 복합적인 것이다.
그 복합적인 태도에 비로소 인간의 두터움이 있고 또 스스로도 그 폭을 측정하기 어려운 일련의 값어치가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실로 진중하고 사려 깊은 민족만이 그런 두터움을 유지하고 또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분주히 바깥으로만 치닫는 정신, 일 차원적 공방에만 무사려하게 길들여진 정신이 그것을 유지할 수도 없고 인식할 수도 없다는 것은 크나큰 비극이다.
상대방의 약점 하나가 불거지면, 또 무슨 부정 비리 하나가 터지면 온 세상이 일제히 깡통을 두드려가며 야단법석을 떠는 이 기괴한 관행은 어쩌면 서글프게도 우리의 그런 비극성을 열방 앞에 낱낱이 드러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수태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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