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후보에게는 ‘대쪽’이라는 별칭이 따라다닌다.이 말에 담긴 상반되는 이미지 중에는 ‘차갑다, 독선적이다, 귀족적이다’ 는 등의 부정적인 느낌이 포함돼 있다.
‘원칙을 지킨다, 깨끗하다’ 는 긍정적 의미에도 다소 경직된 이미지가 배어있다. 반면 지인들은 이 후보를 감정 표현에 서툴지만 부드럽고 정이 깊은 사람으로 평한다.
부인 한인옥(韓仁玉)씨는 “자기를 안으로 볶으면서 사는 분”이라고 표현한다.
이렇듯 상반된 평을 받는 이 후보의 기질은 성장과정에서 어렴풋이 드러난다.그는 1935년 6월 황해 서흥에서 태어났다.
이 후보는 잦은 이사와 전학, 검사시절 사상범으로 몰린 부친 이홍규(李弘圭ㆍ97)옹의 억울한 구속과 이로 인한 소년가장 경험 등 급격한 환경변화 속에 청소년기를 보냈다.
경기중학교로 전학한 49년 9월까지 부친의 임지를 따라 장흥, 광주, 순천, 광주, 청주를 오가며 학교를 옮겼다.
학적부마저 남아있지 않을 만큼 잦은 전학이었다. 이 후보는 자서전 격인 ‘아름다운 원칙’에서 당시를 “짐을 꾸리며 나는 늘 ‘이번에는 또 어떻게 친구들을 사귀고 놀림 받지 않는 아이가 될까’ 하는 고민으로 한숨을 내쉬곤 했다”고 술회한다.
그러나 그는 전학할 때마다 “더 적극적이 되도록 스스로를 독려했다”고 한다.
경기중 전학 당시에는 ‘촌놈’으로 얕보일까봐 공연히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다녔고, 텃세를 부리는 것으로 보이는 급우에게는 결투를 신청하기도 했다. 청주중 1학년 때는 저학년 야구모임을 꾸려 리더 역을 자임하기도 했다.
청주중 2학년 때는 수학시험을 망쳤다는 이유로 가출, 몇 십리를 걸어 조치원역에서 서울행 열차를 기다리다 집에 되돌아오기도 했다.
“자신감을 잃은 자신이 쓸모없어 보였다”는 것이 스스로의 설명인데, 그의 강한 자존심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회갑이 다 된 나이에 뛰어든 정계에서 1년6개월 여 만에 집권 여당의 대선후보를 거머쥐고, 계파나 돈 없이 나름의 카리스마로 야당을 이끈 원동력도, “어려운 상황일수록 자신감을 잃지않고 적극적으로 달려든다”는 유년기의 교훈 덕일 수 있다.
이 후보의 청소년 시절 가장 큰 충격은 경기중 4학년 때인 50년3월 부친이 그의 눈 앞에서 수갑을 찬 채 구속된 일이다.
서울지검 검사이던 이 후보의 부친은 남로당원 혐의 피의자를 무혐의 방면했다 반공법 위반혐의를 받아 사상범으로 구속됐다.
이 후보에 따르면 49년 청주지검 검사로 근무할 때 충북도지사를 구호물자 횡령혐의로 구속하면서 권력층의 미움을 산 탓이라 한다.
해방 후 현직검사 구속 1호였던 만큼 사회적 파장도 컸지만, 당시 15세이던 이 후보가 받은 상처도 극심했다.
이 후보는 당시를 “아버지보다 크고 강하고 사악한 존재가 바깥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나는 경악했다”고 술회한다.
이후 평생 그를 지배한 법과 질서, 정의와 불의 등의 이분법적인 관념들이 그의 가슴 속에 자리잡는 순간이었을 것이라는 게 주변의 설명이다.
이 후보는 부친이 구속된 시기 피난지인 부산에서 어머니와 동생들의 생계를 책임진 소년가장이 된다.
부산체신청 말단 노무공무원으로 취직했지만 얼마 안되는 돈과 한 달에 반 말의 쌀이 급여의 전부여서 이 후보는 점심 시간이면 부산역 광장에서 수돗물로 주린 배를 채우기도 했다.
부친이 얼마 후 검찰의 공소 취하로 풀려나 복직하면서 이 후보의 삶은 정상궤도로 돌아왔지만, 그는 복학 후 대학 진학 때까지 그의 인생에서 드문 다소 일탈된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변론반 친구들과 여러 차례 송도 바닷가에 몰려가 ‘마산 드라이진’이라는 싸구려 술로 울분을 달래기도 하고, 여대생을 희롱하는 동네 건달들에 맞서다 코 뼈가 부러지기도 했다.
‘스카라무슈’라는 서양 검객을 다룬 영화를 보고는 ‘남자간의 의리’에 감동 받아 며칠 밤을 잠 못 이루기도 했다 한다. 대학 시절은 유학을 꿈꾸고 영화관과 음악감상실을 찾기도 하는 등 평범한 모습이었다.
원칙강조로 '차갑다' 경직된 이미지도 남겨
그의 ‘대쪽’ 성격이 본격적으로 부각된 것은 80년대 이후다. 71년 사법파동 불참 등으로 현실타협적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군부독재가 서슬 퍼렇던 80년대 초 대법원 판사(현 대법관)가 되면서부터 소수의견을 쏟아냈다.
5년간 전원합의체 사건 46건 중 그가 소수의견을 낸 것은 10건. “고문으로 인한 억압적 심리상태가 계속된 상태에서 자백은 증거능력이 없다”, “공안사건도 48시간 이상 구금하면 경찰관을 불법감금죄로 처벌해야 한다” 등 민감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정치적인 고려 없이 ‘법대로’ ‘양심대로’ 판결한 이 후보는 미운 털이 박혀 86년 재임용에서 탈락했지만, 박원순(朴元淳) 변호사는 “그의 소수의견은 국민 인권과 사회적 약자 편에 서 있었다”고 기억한다.
88년 중앙선관위원장이 된 후 두 번의 재선거에서 전 후보를 불법선거혐의로 고발하고, 각 당 총재에게 ‘선거법 준수’를 요구하는 경고서한을 보낸 것도 이러한 ‘법대로’ 원칙의 연장이었다.
그는 93년 감사원장 때는 감사원법에 따라 청와대를 비롯, 성역 없는 감사를 단행했고, 같은 해 총리 임명 후에는 총리에게 주어진 법적 권한을 행사하려다 당시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의 역린(逆鱗)을 건드려, 127일 총리로 단명하기도 했다.
안준현기자
dejavu@hk.co.kr
■친·외·처가 모두 명문 집안
이회창 후보의 친ㆍ외ㆍ처가는 한결같이 내로라 하는 명문 집안이다. 그의 귀족 엘리트 이미지도 상당부분 이러한 화려한 가계에서 기인한다.
이 후보의 부친은 ‘대쪽 검사’로 이름났던 이홍규(李弘圭ㆍ96)옹, 중부(仲父)는 한국 최초의 이학박사이자 노벨상 후보에까지 오른 이태규(李泰圭ㆍ작고) 박사다.
형 회정(會正ㆍ70)씨는 삼성의료원 병리과장이며, ‘세풍’ 사건에 휘말린 동생 회성(會晟ㆍ57)씨는 에너지경제연구원장을 역임했다. 친가에서만 2대에 걸쳐 7명의 박사를 배출했고, 4촌 이내 경기고 동문이 14명이다.
외가는 전남 담양의 천석꾼 명문가로 외삼촌 세 명이 모두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이모 김삼순(金三純ㆍ94)씨는 한국 최초의 여성 농학박사이자 독보적인 균(菌) 학자다.
장인은 한성수(韓聖壽ㆍ작고) 전 대법관. 다른 친ㆍ인척들도 대부분 명문대 출신의 쟁쟁한 전문직 종사자로 소위 돈 되는 일에 몰려 있는 우리 사회의 다른 명문가와는 사뭇 다르다.
이 후보는 명문가에서 어려움을 모르고 자라지 않았느냐는 세간의 시선에 대해 상당히 억울해 한다. 86년 변호사 개업 때까지 이 후보는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50년째 낡은 구옥에 살고 있는 부친 이홍규 옹은 76년 변호사 개업을 준비하던 이 후보에게 “법관의 길을 선택한 것이 돈 때문이었냐“고 호통을 쳤다 한다.
그러나 이 후보의 명문가 출신 배경이 세간에 상당히 부정적으로 비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난 3월 빌라문제와 손녀 원정출산 의혹 등이 큰 파문을 일으킨 것도 귀족 이미지와의 상승작용이 큰 몫을 했다는 평이다.
안준현기자
dejav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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