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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이야기] (7)김해 양동리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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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이야기] (7)김해 양동리 고분군

입력
2002.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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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는 화려한 철기 문화를 꽃피웠지만 후세의 연구가 미흡해 한동안 우리 역사에서 잊혀진 존재였다.김해 시내에서 서남쪽으로 약 4㎞ 떨어진 양동리 가곡마을 야산에 자리잡은 고분군은 가야를 당당한 고대 국가로 자리매김하는데 결정적 계기가 된 유적이다.

동의대 박물관은 김해시의 의뢰를 받아 해발 90m 야산 정상에서 남서쪽 끝자락까지 약 3만평에 걸친 유적 중 산 6의1,2번지 4,000여평에 대해 1990~96년 6차례 발굴을 실시했다.

도굴되지 않은 처녀분이 10여기에 불과할 정도로 훼손이 심한데다, 수백 년에 걸쳐 고분들이 켜켜이 쌓인 탓에 발굴은 그야말로 얽힌 실타래를 푸는 것 같았다.

갈기갈기 찢겨진 유구들을 장님 코끼리 만지듯 더듬어가는 지루하고 힘겨운 과정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한 두 점씩이나마 깜짝 놀랄만한 유물들이 끊이지 않고 나와준 덕분이다.

발굴된 고분은 토광목관묘, 토광목곽묘, 수혈식석곽묘, 옹관묘 등 총 548기이며 유물도 토기 2,000점, 토제품 12점, 철기 3,059점 등 5,192점에 달했다. 발굴 내내 “도굴되지 않았다면, 좀더 일찍 발굴이 이뤄졌다면…”하는 아쉬움을 떨칠 수 없었다.

양동리 고분군 발굴 성과는 실로 엄청났다. 고분의 조성 연대는 상한(上限) BC 2세기 말에서 하한(下限) AD 5세기로 추정되는데, 특히 가야의 모든 묘제가 망라돼있고 AD 1세기에서 5세기까지는 공백 없이 이어져 그동안 베일에 싸여있던 AD 1~2세기 가야의 역사가 빛을 보게 됐다.

발굴 및 연구 성과를 토대로 필자는 기록상 AD 42년으로 돼있는 김해 가야국의 시발점이 BC 1세기 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확증을 얻게 됐다.

아직은 다른 학설들이 공존하고 있지만 최근 들어 이런 필자의 주장에 공감하는 학자들이 늘고 있다.

출토된 유물을 통해 가야 문화의 규모와 변천상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특히 갑주(甲胄), 마구(馬具), 농ㆍ공구류 등 수많은 철기 유물들이 출토돼 AD 2세기 후반에서 4세기에 이르는 시기 낙동강 하류지역에 철기 문화가 융성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영롱한 빛이 그대로 살아있는 수정 목걸이 등 다양한 장신구들은 가야문화의 수준이 어떠했는지 보여준다.

또 중국과 바닷길을 통해 활발한 무역을 전개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도 확인됐다.

그동안 김해가 평야지역이라는 점을 근거로 가야를 농업국가로 보는 견해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연구 성과들로 볼 때 가야는 철 교역을 비롯한 활발한 해상 활동을 통해 국부(國富)를 쌓은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 국가로 규정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 가야 역사의 상당 부분은 미완, 혹은 논란 거리로 남아있다. 앞으로 더 활발한 연구가 이뤄져 역사의 공백을 하나하나 메워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임효택 동의대 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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