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월드컵과 부산아시안게임 때 우리나라를 찾아오는 외국인들이 우리말로 간단한 대화를 하고 기본적인 우리 글을 읽을 수 있다면….세계 속에서 우리 나라와 우리 제품의 이미지를 한껏 높이기 위해서는 한국어를 적극 전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세계 경제에서 한국의 위상이 높아졌다고는 하지만, 한국어 보급을 외면해서는 진정한 선진국으로 발돋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동선호(59) 국제교육진흥원장, 백봉자(62) 전 연세대 한국어학당 교수, 독일 태생으로 25년전에 한국으로 건너와 한국인으로 귀화한 이 참(48) ㈜참스마트 대표이사, 한글학회 부회장을 맡고있는 이현복(66) 서울대 명예교수 등 각계 인사들이 8일 한국일보 사장실에서 한국어 세계화의 필요성과 활성화 방안 등을 주제로 의견을 나눴다.
/편집자 주≫
이현복=우리 국력이 성장한 때문인지 한국어에 대한 외국인의 관심이 엄청납니다. 하지만 그들의 관심과 열성에 부응할 만한 여건이 안돼 있어요.
일본과 비교해서도 너무 열악합니다. 자격있는 교사도, 체계적인 교재도 부족하고, 참으로 슬픈 상황입니다.
물론 외국인 입장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가르치기가 구조적으로 힘들긴 하죠. 그렇더라도 우리 말과 글을 배우고 가르칠 욕망을 불러 일으켜야 합니다.
‘한국어는 어려운 언어’라는 선입견을 깰 수 있도록 쉽게 배우고 가르칠 수 있는 교재 개발ㆍ보급에 적극적으로 나서야죠.
백봉자=‘한국어의 세계화’라는 의미부터 정의를 내려봐야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한국어의 세계화라는 것이 어불성설 아니냐.
우리 말과 글을 어떻게 세계에 보급시킬 수 있느냐”고 합니다. 사실 너무 원대한 꿈을 갖는 것은 무리라고 봐요.
현대사회는 무역과 정치를 통한 국제교류가 활발한 데, 무역 상대국으로서 언어가 필요할 때 한국어가 국제어의 한몫을 담당하도록 하자는 겁니다.
동선호=우리의 경제력이 높아지고, 올림픽ㆍ월드컵 등 굵직한 국제행사를 거치면서 한국과 한국어에 대한 외국인의 관심이 덩달아 올라가고 있어요. 우리 말과 글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참=솔직히 한국어는 세계적인 언어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어떠한 경제적 필요에 의해 배우게 되는 것이 세계적인 언어인데, 한국어는 그러한 매력이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한글이 한국인에겐 우수하겠지만 외국인에는 그렇지 않아요. 하지만 언어는 ‘문화의 그릇’ 입니다. 한 나라의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데 언어가 중요한 역할을 하죠.
언어의 보급은 수요와 공급 두가지 측면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한 나라의 경제력이 커지면서 경제적 필요에 의해서 자연히 그 나라의 언어를 배우려고 노력하죠. 한국 경제가 더 발전하고 좋아지면 그렇게 되겠죠.
하지만 적극적인 공급 노력이 더 중요합니다. 외국인이 (한국어를) 배우고 싶을 때까지 기다리는 게 아니라 적극 보급할 필요가 있죠. 한국에서 독일어 잘 하는 사람이 독일 문화를 싫어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어요.
독일어를 배우면 독일 문화를 좋아하게 되고, 깊이 배울수록 독일 문화에 더 매력을 갖게 됩니다. 독일 문화를 좋아하다 보면 절로 독일 제품에 부가가치를 부여하게 됩니다. 고급스런 독일 문화의 이미지가 제품의 부가가치를 높인거죠.
한 나라의 문화를 알리고 그 나라의 제품을 좋아하게 만드는 방법은 언어 홍보가 가장 효과적이라는 얘깁니다.
한국말 잘하는 외국인을 만나 보면 한국 문화에 반하지 않은 사람 없어요. 한국 문화의 깊은 맛을 알고 매력을 느끼게 되면 한국 문화를 세계에 알리고 한국의 이미지와 제품을 자연스럽게 전달하게 되죠. 한국어의 세계화는 시급한 과제입니다.
외국인이 뭐가 궁해서 한국어를 배우겠나 생각해서는 안된다.
독일 등 유럽 각국의 기업은 일본에 직원을 파견할 경우 사전에 일본어를 가르치고 일본 현지에서도 일본어 교육을 철저히 시킵니다. 하지만 한국에 직원을 파견할 때는 한국어 교육을 시키지 않아요.
왜냐하면 일본에서 일본 말을 못하면 경영을 못한다는 개념 때문이죠. 아울러 일본도 자체적으로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자국어 교육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제공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경우는 어떻냐. 먼저 외국인들은 한국에서는 한국어를 몰라도 비즈니스를 할 수 있다는 인식이 뿌리박혀 있어요.
물론 ‘한국 말은 너무 어렵다’는 선입관을 갖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한국어를 저 만큼 하는 외국인을 100명도 못 만났어요. 특히 유럽인들은 한국어를 상당히 어려운 것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어와 비교할 때 한국어가 구조적으로 특별히 더 어려운 점은 전혀 없어요. 결정적 원인은 한국이 적극적인 투자를 하지 않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제대로 가르칠 수 있는 교사와 교재부터가 없어요.
그동안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교사를 많이 접해 보았는데, 대부분 영문과 출신으로 아르바이트 수준에 불과할 뿐 전문성있는 교사가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효과적으로 가르치려면 여러 외국어를 알아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직업으로 갖기에는 처우와 안정성이 너무 낮아요.
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지원과 인식의 전환이 있어야 합니다. 헝가리 불가리아 등 동유럽에는 한국 말을 잘 하는 사람이 예상외로 많아요.
한동안 북한이 공산권에 자국어 교육 전문가를 보내 적극적으로 보급했기 때문이죠. 동유럽 사람들이 뭐가 답답하다고 북한 말을 배웁니까.
북한이 적극적으로 공급했기 때문이지, 스스로 북한 말을 배우려고 한 것은 분명 아닐 겁니다.
이현복=10여년 전 폴란드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일본어 교재는 양적, 질적으로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납디다.
국가적으로 엄청난 예산을 들인 덕분이죠. 우리는 창피할 지경이예요. 조금씩 나아지고 있긴 하지만 메워야 할 구멍이 아직도 너무 많습니다.
백봉자=한국어를 세계화 하자는 국민적 공감대 형성도 중요합니다.
단적으로 동남아 출신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한국어 교육은 어떤가요. 그들이 한국생활을 하면서 접촉하는 한국인은 굉장히 많아요.
국민 모두가 한국어 교사라고 생각하고 그들에게 우리 말 한 두마디라도 더 배울 수 있도록 하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돼야 합니다.
동선호=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칠 수 있는 자질있는 교사가 너무 부족한 데다 교사 확보도 어렵습니다. 교재의 개발ㆍ공급도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고 있어요.
언어권별로 현지 실정에 맞는 교재가 조속히 만들어져야 합니다. 해외에 있는 우리 문화원이나 교육원 등은 사실상 한국어 교육에 손을 놓고 있는 실정입니다. 뭔가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이 참=결국은 정부의 예산지원 문제로 귀결됩니다. 우선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교사는 안정된 직업이라는 인식을 심어줘야 합니다.
정부와 기업들이 적극적인 지원을 해야죠.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교육에 최소한 1,000억원은 투자돼야 합니다. 장기적으로 매년 이 정도 이상의 예산이 투입되야죠.
백봉자=기업들도 한국어 보급에 관심을 갖고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늘리고 그들이 참여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야 합니다.
동선호=한국어 세계화에 대한 남한과 북한의 관심을 보면, 경제적으로는 남한이 월등히 높지만 한국어 보급에 대한 노력은 북한보다 낮은 실정입니다.
이 참=외국인에게 ‘한국어는 어렵다’는 인식을 심어준 것은 결국 한국인 스스로 입니다. 사실 한국어는 특별히 배우기 어려운 언어는 아닙니다.
외국 여행에 나선 한국인들이 외국인 옆에서 ‘저 새끼들’ 이라는 식으로 외국인에게 욕을 하는 습관도 고쳐야 합니다. 한국 말을 못 알아 듣는다고 지레 짐작한 거죠.
이것은 패배주의적 사고 입니다. 한국어는 ‘우리만의 말’이 아니라 외국인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고 공유할 수 있는 언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국민적 공감대 형성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정부가 정책적으로 밀고 나가야 합니다. 인색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팍팍 써야 합니다.
이현복=영국에서 공부한 적이 있는데, 지난 94년 우리나라를 방문한 영국여왕이 직접 저에게 훈장을 줬어요.
한국에서 영국식 영어 표준발음을 연구ㆍ홍보하는 데 공이 많았다고 하더군요. 사실 제 연구에서 영국식 영어가 차지하는 비중은 10%도 채 안되거든요.
영국이 얼마나 자국어를 중시하는 지 절감했어요. 우리 정부는 아직도 팔짱을 끼고 있는 실정인데, 이해할 수가 없어요.
백봉자=기업이 참여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정책적인 지원부터 선행돼야 합니다.
동선호=외국에서 한국어를 배울 수 있는 기회부터 확대돼야 합니다.
해외의 교육원ㆍ문화원에 한국어 강좌를 개설할 수도 있고, 한국어학원 설립도 가능합니다. 기업에서도 이 부분에 관심만 가지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봅니다.
우리가 외국에 유학 갈 때 그 나라의 언어를 알아야 가능한 데, 우리나라에 유학을 오는 학생들은 한국어 대신 영어로 시험을 봐요. 한국어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없기 때문이죠.
이 참=한국어의 세계화를 위해 한국어를 일정기준 이상으로 잘 하는 외국인에게 인센티브를 주는 방안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한국어의 세계화를 위해 우리 모두 노력합시다.
정리=김성호기자
sh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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