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주의 미 프로골프(PGA)투어 정상등극은 한국체육사를 다시 쓰게 할 일대사건이다.국가적 행사인 2002 한일월드컵축구대회를 앞 둔 시점에서 최경주가 이룩한 쾌거는 우리 국민에게 또 한번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최경주가 PGA 투어 정상에 오르는 순간 머리 속에서는 피와 땀, 그리고 눈물의 세 단어가 떠나지 않았다. 최경주가 눈물을 흘리며 부인과 포옹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 눈에도 이슬이 맺혔다.
우승의 영광 뒤에 숨어 있는 고난과 역경은 물론 큰 일을 해낸 뒤 비로소 맛보는 환희와 감격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PGA보다 격이 낮은 일본오픈대회에서 우승했을 때도 나는 머리칼이 쭈뼛 서는 짜릿함에 몸을 떤 적이 있다. 남다른 감회라는 말은 지금 내게 딱 어울리는 표현이다.
동트는 새벽녘 손에 땀을 쥐고 TV를 지켜보던 나는 16번홀에서 최경주가 버디로 추격권을 벗어나자 29년전 오거스타CC를 맴돌던 내 모습을 떠올렸다.
1972년 10월 일본오픈 우승자 자격으로 PGA 최고 권위의 마스터스대회 출전권을 얻은 나는 이듬해 4월 오거스타CC를 밟으며 ‘한번 해 보자’는 각오를 다졌다.
그러나 세계의 벽은 생각보다 훨씬 높았다. 한국인 최초로 PGA 무대에 도전한다는 책임감이 앞선 나는 2라운드 152타를 기록, 한 타차로 예선탈락의 수모를 겪었다.
정신력은 자신이 있었지만 체력과 기술의 한계는 어찌해볼 재간이 없었다. 눈을 세계로 돌리자는 다짐도 이때 시작됐다.
땅도 낯설 뿐 아니라 음식과 언어 등 문화의 차이도 넘긴 힘든 벽이었다. 83년 12월 한국프로골프협회장에 선임된 뒤 첫 사업으로 미국 전지훈련을 마련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 해 일본의 아오키 이사오가 PGA 하와이오픈에서 동양인 최초로 우승컵을 차지한 것도 자극이 됐다.
내가 골프채를 처음 잡은 40여년전과 지금은 골프문화가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라져 있다. 골프 꿈나무만 5,000명이 넘는다. 또 많은 꿈나무들이 미국 등에서 선진골프를 배우고 있다.
그러나 진리는 변한 게 없다. 세계무대의 정상에 서려면 타고난 재능과 함께 뼈를 깎는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내가 연습장에서든 필드에서든 최경주를 만날 때마다 격려해준 말도 이 것밖에 없다. 불가능하다는 주위의 평가를 잠재운 최경주에게 다시 한번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한장상 원로 프로골퍼
●프로필
▲1940년 3월28일 서울 출생
▲프로데뷔:1957년
▲우승:국내 22승 해외3승
72년 일본오픈
72년 그랜드모나코오픈
73년 일본 구즈와국제오픈
73년 PGA마스터스대회 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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