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3,000명의 근로자와 2,500개의 협력업체를 가진 대기업 하이닉스반도체에 다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다. 채권단과 마이크론사 사이에 어렵게 체결된 메모리부분 매각 양해각서와 채무조정안을 하이닉스 이사회가 만장일치로 부결시켰기 때문이다. 마이크론사도 공식적으로 협상 결렬을 선언하였다. 정부와 채권단은 하이닉스 문제 해결의 돌파구를 찾기 위해 골몰하고 있으나 거의 매일 새로운 방안이 제시되는 것을 보면 아직 뾰족한 대안은 없는 듯하다.정부와 채권단은 왜 하이닉스 매각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을까? 그것만이 하이닉스 메모리 부분의 정상적인 기업활동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부의 강력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하이닉스 메모리부분 매각이 성사되지 못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 해답은 아이러니컬하게도 IMF 환란 이후 단행된 정부의 기업개혁조치에서 찾을 수 있다.
국민의 정부는 IMF 환란의 원인중 하나가 기업경영의 불투명성이라고 판단하고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획기적인 조치를 단행하였다. 그 중 하나가 사외이사제도의 도입이다. 상장법인의 경우, 의무적으로 이사회의 과반수 이상을 사외이사로 구성해 대주주의 경영 전횡을 견제하도록 하였다. 하이닉스반도체의 경우도 10인의 이사회 멤버 중 7인이 사외이사이다. 이들은 기업인, 대학교수, 전직 은행감독원장, 전직 시중은행장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중에는 외국인도 2명이나 들어 있다. 정부에서 원하는 모범적인 이사회 구성 형태이다.
그런데 이들이 채권단안을 거부하였다. 채권단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그 안을 거부한 것은 새로운 제도에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이사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한 결과이다. 채권단의 채무조정안대로 하면 전체 매출액 중 90%를 차지하는 메모리 부분을 매각하고 남는 잔존 하이닉스 법인은 회생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잘해야 연간 매출액이 8,000억원대의 기업에 3조원의 부채를 남겨 놓으면 감당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에다 매각후 계속해서 책임져야 할 우발채무액도 확실치 않다. 양해각서에 따라 잔존법인에 20%의 지분을 투자하여야 하는 마이크론사에서도 잔존법인의 회생 가능성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하이닉스측에 통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차라리 매각안을 거부하고 반도체 가격이 오르기를 바라는 것이 회사를 위해서는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지난해 10월 부채상환만기 재조정과 출자전환을 통해 하이닉스를 부도위기로부터 구해준 채권단과 정부 입장에서 보면 이번 결정은 신의를 저버린 무책임한 행위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일부에서는 채권단 주도로 하이닉스 구조조정안을 밀고 나가기 위해서는 기존 이사들을 전원 교체하여야 한다는 말도 나온다. 그러기 위해서 채권단이 보유하고 있는 전환사채를 조기에 주식으로 전환하여 지분율을 75%까지 높이자고 한다.
그러나 이 경우 정부는 자기 모순에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대주주인 채권단의 지시에 순종하는 이사회를 구성하자는 이야기인데, 이는 정부가 그동안 주장해 오던 기업지배구조의 투명성 확립이라는 대원칙을 스스로 저버리는 셈이기 때문이다.
이번 협상에서 정부와 채권단은 마이크론과의 매각협상에만 온갖 노력을 쏟았을 뿐, 정작 매각안 수용 여부에 대한 의사결정권을 가진 하이닉스 이사회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쓴 것 같지 않다. 과거 관행처럼 이사회 통과는 요식행위로 간주한 것이다. 정부는 새로운 제도만 도입했지 자신은 스스로 이 제도에 맞게 행동할 준비가 안되어 있다. 이번 사건은 아무리 좋은 제도를 도입하더라도 정부의 의식전환 없이는 엉뚱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교훈을 주는 좋은 예이다.
/홍기택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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