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초 원로도예가 지순탁 선생님(작고)을 만나 도예에 입문했다. 강원 홍천군 두촌면 장남리 첩첩산골로 가 도자기를 굽기 시작했다. 사실 ‘굽는 작업’이라기 보다는 ‘재현 작업’이라고 해야 옳다. 민족의 수난으로 계승 발전시키지 못하고 단절된 우리의 찬란한 전통 도자문화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이기 때문이다.그러나 그때만 해도 도자기 굽는 일은 어리석은 사람이나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릇다운 그릇을 만들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릇이 나와도 구입하는 사람이 없었다. 먹고 살기 위해 ‘굽는 작업’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1977년 겨울이었다. 2년6개월간 지 선생님과 강원도에서 분청사기 재현작업을 끝내고, 경기 이천시 신둔면 수광리에서 ‘도원요’라는 가마를 연 뒤였다. 강원도의 경험을 바탕으로 나만의 분청사기 작업에 한창 열중하던 때였다.
분청사기의 아름다움은 각별한 데가 있다. 고려청자의 귀족적인 화려함이나 조선백자의 매끄러운 결벽성과는 다른 질박한 아름다움이다. 못생긴 듯 하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의젓하고도 싱싱한 맛을 풍긴다.
분청사기 작업은 정성을 생명으로 한다. 흙을 고르고 문양을 새겨 초벌구이를 하고 유약을 바른 뒤 마지막 재벌구이를 위해 가마에 넣을 때까지 온 정성을 다 바쳐야 한다. 그 다음 어머니 몸에서 태어나는 새 생명처럼 신(神)의 뜻을 맡긴다고 할까? 섭씨 1,250도의 열을 가하고 나면 가마를 식히는 시간이 필요한데, 마치 분만실에 들어간 산모를 기다리는 남편의 심정이 된다.
유난히 추웠던 그 해, 오랜 기다림과 설레임으로 가마 문을 여는 순간 그렇게도 원했던 찻그릇이 거기에 있었다. 바로 ‘정호차완’(井戶茶碗)이다 그 순간의 감격은 글로 표현할 수 없다 그래서 그 찻그릇은 늘 내 곁에 있었다. 잠자리에 들 때는 가슴에 품고 있었고, 낮에는 정겨운 벗과 대화하듯 ‘가슴으로’ 대화를 나눴다.
일본의 차인들이 ‘정호차완’이란 찻그릇을 국보로 지정한 심정을 이해할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얼마나 마음속에 그리며 꿈꿔온 그릇인가! 흙과 불의 조화로 태어난 그 그릇은 그러나 성장한 자녀를 출가시키듯 떠나보냈다. 일본의 어느 차인 집에서 사랑받고 있겠지만 탄생의 그 순간은 잊을 수 없다.
/박부원 도예가·전 왕실도자기도예가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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