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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호 칼럼] 부패의 뿌리 뽑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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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호 칼럼] 부패의 뿌리 뽑으려면

입력
2002.05.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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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거성 톨스토이는 말년에 러시아 교회에서 파문당할 정도로 반항아였지만 민주주의에는 반대했다. 권력은 사람을 부패시키는 속성을 지니고 있으니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는 군주정 아래에서는 왕의 측근만 도덕적으로 부패하고 말지만 만민이 권력을 나누어 행사하는 민주체제가 되면 사회 전체가 부패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 이유였다.권력의 핵심부에서부터 지방자치단체장에 이르기까지, 대학과 교회에서 언론이나 아파트 분양업체에 이르기 까지, 권력형 비리와 부패의 냄새가 코를 찌르지 않는 곳이 없는 듯한 오늘의 우리 세태를 바라보느라면 톨스토이의 천재적 혜안에 다시금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몇 해전 두 전직 대통령을 심판대에 세웠을 때만해도 국민은 들끓는 분노와 수치심 속에서도 긍지와 희망을 느낄 수 있었다. 드디어 우리는 대통령을 재판에 회부할 만큼 민주화에 성공했으니 독재의 부산물인 권력형 비리와 부패는 이 땅에서 뿌리 뽑히게 될 것으로 믿고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문민정부 5년과 국민의 정부 4년여를 거치면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이미 수치와 분노를 넘어선 냉소와 허탈감뿐이 아닌가 싶다. 연쇄폭발식으로 터져 나오는 권력형 비리와 범죄 사건들은 권력 남용이 결코 군사독재의 전유물이 아니며 민주화에 앞장섰던 가난한 투사들이라 해서 비리와 부패에 면역되어 있는 것이 아님을 너무도 명백하게 드러내 주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누구를 믿고 어디에 기대를 걸며 살아갈 것인가? 몇 달째 언론 매체들은 권력형 비리 사건들에 연루된 유명인들의 행보를 추적하는데 여념이 없는 듯하다. 비리의 주인공들을 색출해내 법의 심판을 받게 하는 일에 국민의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하고 그들은 처벌을 면할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대통령을 포함한 몇몇 개인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만으로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부패와 권력남용을 막을 실마리가 잡힐 것인가 하는 것이다.

12월에는 새 대통령이 선출된다. 그러나 누가 당선이 된들 지금과 같은 정치구조 속에서 부패가 근절될 수 있을 것인가? 대통령 또는 대통령 후보들의 측근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특별한 도덕적 결함을 지닌 사람들이었다고 믿을 근거는 없다. 그들이 저지른 비리가 주변의, 아니 어쩌면 사회 전체의 공모나 동조, 아니면 적어도 방관이나 묵인없이 저질러질 수 있었을까?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혜택을 누릴 때에는 그것이 비리인줄 자각하지 못하고 남에 대해서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유혹에 빠진다. 비리를 저지른 장본인들의 죄를 비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을 막고 부패와 비리를 뿌리뽑는 참된 길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이제 이러한 질문들을 던지지 않으면 안된다.

민주주의란 국민이 주인이라는 주장이고 주인이 된다 함은 국가 살림에 대해 주인으로서 권리를 갖는 동시에 의무와 책임을 지게 되는 것을 뜻한다. 각계 각층의 국민 모두가 힘있는 사람에게 기대 부당한 이득을 취하고자 하는 유혹에 휘말리지 않고, 윗사람의 지시나 가까운 사람의 청탁이라도 부도덕하거나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면 개인적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거부하고 고발하는 도덕적 성숙성과 용기를 갖지 못하는 한, 제3의 제4의 ‘소통령’들이 나오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합법적으로 모금할 수 있는 정치자금과 실제로 선거에 쓰이는 돈의 액수간에 차이가 더 크게 벌어지는 상황에서 유권자들이 선거에 출마한 정치인들은 어디에서 돈이 나와 그렇게 쓰는지 따지며, 인물의 도덕적·정치적 자질을 평가해 투표하는 대신 사적 연고에 따라 또는 돈 많이 쓰는 유세에 현혹되어 표를 던지는 미숙함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당선후 투자한 본전에 이자까지 합쳐 뽑아내려는 음모와 결탁된 권력형 비리가 다시 태동할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 아닌가?

우리는 톨스토이처럼 민주주의의 전망에 대해 비관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반론을 무서운 경고로 경청하고, 우리 모두가 국민의 도덕적·정치적 책임을 통감하며, 언론도 지면을 범죄자들의 세세한 행보에까지 할애하여 역겨운 감정을 부추기는 대신 비리와 부패가 깃들 수 없는 건전한 사회구조를 구축하는 방법에 대한 냉철한 이성적 논의에 앞장서는 것이 부패의 뿌리를 뽑는 첩경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인호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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