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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 (36)유세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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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 (36)유세장에서

입력
2002.05.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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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구리시에는 3명이 출마했다. 13대 총선에서 차점자를 큰 표 차로 누르고 당선한 전용원(田瑢源ㆍ현 한나라당 의원) 민자당 의원, 5대1의 공천 경합을 뚫고 출마한 조정무(曺正茂ㆍ현 한나라당 의원) 민주당 후보, 그리고 국민당 후보인 나. 이렇게 3명이었다.유세장 풍경은 진짜 재미있었다. 원래 유세장에는 많아야 1,000명이 모이는데 내가 가는 유세장에는 최소 1만 명 이상이 모였다.

상대 후보가 이를 비꼬듯 말했다. “보시라. 정주일 후보가 현대 직원을 모두 동원했다.” 나는 이렇게 응수했다. “만약 당신 집이 양조공장을 하고 직원이 50명인데 당신이 출마를 했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그 직원들이 오지 않으면 당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

다른 후보는 “느닷없이 딴따라 한 명이 이 곳 구리에 철새처럼 날아와 물을 흐려놓고 있다”며 나를 깎아 내렸다. 가만히 있을 이주일인가. “구리가 공기 좋고 인심 좋으니 철새가 날아온 것 아니냐?” 유권자들은 박수를 치고 난리가 났다. 결국 그 후보는 유세 마지막 날에는 유세장에 나오지도 않았다.

이런 일도 있었다. 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유세였다. 상대 후보가 원고를 읽고 있었는데 마침 운동장 옆의 철길로 경춘선 열차가 지나갔다.

열차 굉음으로 무슨 말을 하는지 도대체 알아들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그 후보는 계속 자기 이야기만 했다. 그날 외신기자 10여 명이 나를 취재하기 위해 온 탓에 정신이 좀 없었던 모양이다.

내 차례 때도 화물열차가 지나갔다. 나는 연설 대신 물을 마시고 연단 위에서 다리 운동을 했다. 하나 둘, 하나 둘…. 사람들은 또 한번 뒤집어졌다. 하라는 연설은 안 하고 달밤에 체조를 한 격이니 안 뒤집어질 수가 있나. 열차가 지난 간 뒤 나는 정중하게 말했다. “제가 당선되면 우선 이곳에 방음벽부터 만들겠습니다.” 우레 같은 박수가 터진 것은 물론이다.

어떤 후보는 내 외모에 대해 인신공격성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오리궁둥이로 까불던 놈이 구리 시민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나는 눈 깜짝 안 하고 차분히 응수했다. “당신 아드님도 제 오리걸음을 보고 따라 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듣기에는 아드님이 아주 훌륭하게 잘 자랐다고 하던데요.” 그 후보는 할 말을 잃었다.

유세장에 나온 어린이들 덕도 많이 봤다. 무명시절 고생한 이야기를 30쪽짜리 만화에 담아 초등학생들에게 돌렸는데 이게 큰 효과를 봤다. 유명 연예인으로만 알았던 이주일이 그렇게 많은 고생을 했다는 사실이 감동을 준 모양이다.

아이들 수백 명이 유세가 열릴 때마다 맨 앞줄에 앉아 나를 지켜봤다. 이 아이들 부모가 모두 나를 찍어줬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어떻게 그 조그만 동네에서 7,000표 차로 이길 수 있었겠는가.

선거운동 마지막 날인 3월23일이 왔다. 이미 판세는 내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3당 모두 ‘이주일 우세’를 예상했다. 정주영(鄭周永) 대표는 이날 구리시 덕현아파트 부지에서 열린 정당연설회에서 “현 정부는 두 명의 정 서방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있다”며 확실한 표 다지기에 나섰다.

나도 연단에 올라 마지막으로 한마디했다. “여러분, 내일 투표용지에 ‘이주일’ 이름이 없다고 찍지 않으면 저는 엉망진창이 됩니다. 정주일, 아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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