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 고위층이 2000년 4.13 총선 전후로 진승현(陳承鉉) MCI코리아 부회장에게서 거액의 자금을 마련, 고위인사에게 전달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그동안 정치권에서 제기돼 온 국정원의 벤처자금 총선 지원설이 점차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진승현 게이트’는 이제 한 벤처기업가의 단순한 구명로비 스캔들이 아니라 선거자금 조성을 위한 국가기관의 조직적 개입ㆍ비호 사건이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뿐만 아니라 정현준(鄭炫埈)ㆍ이용호(李容湖)ㆍ윤태식(尹泰植) 게이트 등 각종 벤처비리 사건도 여권을 위해 국정원이 ‘통치자금’ 또는 정치자금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불거진 한 몸통의 비리사건이라는 해석이 유력하다.
우선 진씨 등 벤처기업인들에게 국정원 고위층이 먼저 접근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정성홍(丁聖弘) 전 국정원 과장은 엄익준(嚴翼駿) 전 2차장의 지시를 받고 ‘특수사업’ 자금조성 목적으로 총선 직전 진씨에게 먼저 접근했다고 말했다. 이미 전주(錢主)를 정해놓고 치밀한 기획하에 포섭에 나섰다는 얘기다.
정현준 한국디지탈라인(KDL) 사장이 김재환(金在桓)씨와 정 전 과장을 만나게 된 경위도 석연치 않다. 소개 과정에 국정원 인사가 관여했고 김씨는 단번에 KDL 부회장으로 영입돼 국정원과의 연락책 역할을 했다. 당연히 국정원 배후설이 의심되는 대목이다.
스마트디스플레이(SD) 등 벤처기금 비리사건에도 국정원이 깊숙이 연루돼 있다. 국정원 4급 직원이었던 김규현씨는 SD 등 벤처업체로부터 50억원대의 주식뇌물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고 윤태식씨와 국정원의 유착의혹도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이들이 국정원과 유착된 시기는 대부분 99년 말~2000년 상반기로 벤처열풍과 함께 총선이 치러진 시기다. 당시 정부가 추진하던 벤처육성정책의 한 축을 국정원이 맡았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 따라서 코스닥시장 과열로 돈방석에 앉은 벤처기업을 정치권의 새로운 자금원으로 포섭한 게 국정원이었다는 지적이다.
더구나 국정원에 무시로 거액의 자금제공을 요청할 정도라면 여권 고위층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게 정치권의 시각. 따라서 여권 핵심실세와 국정원 고위층이 결탁한 비선조직이 ‘특수사업’이라는 미명하에 벤처로부터 정치자금을 조달했을 공산이 크다.
수시로 정보보고를 하고 로비자금을 주고받은 권노갑(權魯甲) 전 민주당 고문과 김 전 차장의 관계는 이러한 측면에서 예사롭지 않다. 정 전 과장은 총선 직전 진씨 돈 1억원을 김홍일(金弘一)에게 제의했고 김방림(金芳林) 의원과 허인회(許仁會)씨에게도 진씨 돈 5,000만원씩이 실제 전달됐다.
국정원이 특수사업 명목으로 벤처에서 끌어들인 자금규모는 수백억원대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진씨의 한 측근은 “진씨 자금 중 100억원이 비어있고 이 돈이 정치권으로 흘러들었을 것”이라고 말해 이러한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배성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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