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는 어떻게 시작할까. 인류가 처음 대지를 딛고 살아가기 시작했을 때 제일 궁금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인류는 유년시절인 원시시대에 천진한 아이들처럼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해 많은 의문을 품었을 것이다.
그 중 가장 원초적인 의문은 무엇이었을까. 기원전 3세기 무렵 중국 초(楚) 나라의 시인 굴원(屈原)은 ‘하늘에 묻는다(天問)’라는 시에서 마치 아이들처럼 연신 물음을 던진다.
태초의 일을 누가 전해 주었던가/ 형체 없던 하늘과 땅 어떻게 해서 생겼는가/ 해와 달이 뜨는 이치 뉘라서 알 수 있을까/ 혼돈의 그 모습을 무슨 수로 볼 수 있나
인류가 최초에 품었던 의문은 하늘과 땅, 해와 달, 낮과 밤 등의 이 세계가 어떻게 해서 이루어진 것인지에 대한 것이었다.
인류는 우선 자신을 둘러싼 이 세계의 내력을 알아야만 굳건하게 대지에 발을 딛고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대답을 해주는 것이 창조신화이다.
거의 대부분의 창조신화는 이 세계가 혼돈(混沌)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제주도 무가(巫歌)도 태초에는 하늘과 땅이 뒤섞여 사방이 캄캄하다고 했고 그리스 신화도, 히브리인들의 창세기도 혼돈과 어둠이 태초의 세계를 지배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
중국도 예외는 아니다. 기원전 2세기 무렵 한대(漢代)의 사상가 유안(劉安)이 쓴 ‘회남자(淮南子)’는 이 세계가 탄생하기 전 곧 태초의 시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옛날 아직 하늘과 땅이 생겨나지 않았을 때 다만 어슴프레한 모습만 있었지 형체는 없었고 어둑어둑할 뿐이었다.
그런데 중국의 신화가 다른 것은 혼돈을 아주 구체적인 생물체로 표현했다는 점이다. 어느 나라 신화에서나 자연현상은 신이 된다.
태양도 사람처럼 아침에 일어나서 하루종일 하늘 길을 달리다가 저녁이 되면 서쪽 끝 호숫가에서 쉬고 다음날 아침 다시 일어난다.
그러나 그리스 신화나 히브리신화가 혼돈을 개념으로 본 반면 중국신화는 태초의 혼돈조차 신으로 만들었다.
기원전 3∼4세기 전국시대(戰國時代) 초나라의 무당(巫) 계층이 편집한 중국의 대표적 신화서인 ‘산해경(山海經)’에 따르면 혼돈은 신비하고 괴상한 새이다.
‘산해경’이 편집될 무렵의 최고 권력자는 제후였다. 무당이 권력자와 동일시되던 시대는 일찌감치 끝나 있었다.
당시 무당은 제후의 의뢰를 받아 점을 치는 사제역할을 하거나 민간에서 병치료를 해주는 주술사였다. ‘산해경’에 실린 신화를 보존한 무당은 바로 이 민간에서 활동하던 주술사 같은 존재였다.
산해경에 나오는 혼돈은 이름조차 따로 있다. 그 이름은 ‘제강(帝江)’이다. 그러나 이 새는 말만 새일 뿐 우리가 지금 보는 가볍고 날렵한 형상이 아니다.
푸대자루 같이 생겼는데 불덩어리같이 붉은 빛을 띠고 있고 다리 여섯 개와 날개 네 개가 달려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눈 코 귀 입 등 얼굴이 하나도 없다. 그러니까 이 새는 정말 혼돈 속의 어두운 상황처럼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답답한 모습이다. 그렇다고 이 새가 정말 답답하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이 새는 다른 재주가 있는데, 바로 춤과 노래를 즐길 줄 알았다. 이목구비도 없고 코끼리 사촌 같은 몸매를 한 제강이 춤과 노래까지 즐긴다니 정말 가소롭지 않은가.
춤과 노래는 기록문학이 생기기 이전 원시종합예술의 핵심이다. 몰톤의 민요무용설에 따르면 춤과 노래는 모든 예술의 근원적인 형태이며 우주에 충만한 에너지의 흐름을 표현한 것이다.
거의 혼돈 상태나 다름없는 광란의 축제 형태인 오르기(Orgy)에서 가장 격렬한 행위로 표현되는 것이 춤과 노래이다. 태초의 태초, 혼돈의 신 제강에게 그러한 속성과 능력은 당연한 것이리라.
이 혼돈의 신은 ‘산해경’보다 조금 늦게 나온 ‘장자’(莊子)에서는 훨씬 인간화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제 혼돈의 신은 이름도 혼돈이다.
‘장자’에 따르면 혼돈의 신은 이제 세계의 중앙을 다스리는 임금이 되어 있고 그에게는 두 명의 임금 친구도 생겼다.
그들은 남쪽 바다를 다스리는 ‘숙( )’과 북쪽 바다를 다스리는 ‘홀(忽)’이었다. 이들의 사이는 아주 좋았다.
숙과 홀은 가끔 혼돈이 사는 곳에 놀러 갔는데 그때마다 혼돈은 손님 대접을 잘 하였다. 두 친구는 감동하여 혼돈의 성의에 어떻게 보답할까 상의한 끝에 다음과 같은 결정을 보았다.
“우리 모두는 몸에 눈 코 입 귀 등 7개의 구멍이 있어 그것으로 보고 듣고 먹고 숨쉬잖아. 그런데 이 친구만 그게 없거든. 얼마나 답답하겠어.
그러니 우리가 구멍을 뚫어주면 좋아할 거야.” 두 친구는 곧 이 일에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혼돈의 몸에 하루에 구멍 한 개씩을 뚫어 나갔다.
7개의 구멍을 다 뚫어 준 이레째 되는 날 혼돈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웬걸? 혼돈은 그만 죽고 말았다. 이것은 혼돈이 사라지고 세상의 창조가 완성된 히브리민족 창세기의 이레와는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장자’에 실린 글은 짤막한 동화와도 같다. 중국 문학에서는 이러한 양식의 글을 우언(寓言)이라고 부른다.
서구의 이솝이나 라퐁텐 등의 우화(寓話)와 비슷한 성격의 문학이다. 그렇다면 ‘장자’에서는 혼돈의 우언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려 했던 것일까? 여기에서 혼돈은 맑고 순박한 자연의 본질을 상징한다.
구멍을 뚫는 것은 인위적인 조작을 가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결국 이 우언은 자연은 있는 그대로 두어야지 인간이 꾸미고 다듬게 되면 파괴되고 만다는 교훈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 교훈은 일찍이 노자(老子)에 의해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사상으로 성립된 바 있었다. 그것이 다시 장자(기원전 369?~기원전 289?)에 의해 우언의 형식으로 표현된 것이다.
‘장자’의 우언은 그러나 보다 근원적인 신화를 함축하고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혼돈에서 이 세계가 비롯된다는 의미이다.
숙과 홀의 본래 뜻은 ‘잠깐’이나 ‘순간’으로 이들은 시간을 상징한다. 혼돈이 숙과 홀에 의해 죽음을 당한다는 내용은 혼돈의 시대가 이제 시간이 지배하는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뜻한다.
시간이 지배하는 시대란 곧 인간이 지배하는 역사의 시대이다. 결국 혼돈의 죽음은 이 세상의 창조를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지배하는 시대가 성립된 이후 혼돈은 인간들 사이에서 어떤 이미지로 남아 있을까? ‘장자’보다 훨씬 뒤인 3∼4 세기경에 지어진 ‘신이경’(神異經)이라는 작자 미상의 고대 소설에서 죽었던 혼돈은 모습을 바꾸어 다시 출현한다.
‘신이경’에 의하면 혼돈은 그 생김새가 개 같기도 하고 곰 같기도 한데 눈이 있는데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는데도 듣지 못하는 괴상한 동물이다.
혼돈은 또 성질이 괴팍해서 훌륭한 인품을 지닌 사람이 나타나면 달려가서 들이받고 못된 사람이 오면 그 곁을 졸졸 따라다녔다.
혼돈은 어쩌다 이렇게 한심한 동물로 변해 버렸을까? 인간이 중심이 된 시대에 들어와서 우리는 똑똑하고, 분명하고, 논리적인 것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러니 무질서와 혼란, 어둠의 상징인 혼돈이 좋게 비쳐질 리가 없다. 결국 혼돈은 과거에 숭배받던 신의 위치에서 보지도, 듣지도 못할 뿐 아니라 판단 능력도 없는 멍청한 동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신이경’ 이후에도 우리는 혼돈을 불신하고 합리성과 정확성을 신봉하는 인간의 역사를 만들어 왔다.
멍청한 혼돈을 불신했다는 것은 말없는 자연을 멀리하고 인간 중심으로 살아왔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만들어온 이러한 역사가 과연 보기 좋고 행복하기만 했던가?
우리는 오늘날 자연과의 괴리로 인해 빚어진 환경ㆍ공해 등 온갖 심각한 문제에 직면해 있다. 우리가 추구한 합리성, 그것은 인간을 기계화하여 꿈과 상상의 자리를 박탈하고 창조의 능력을 둔화시켰다.
혼돈은 과연 무질서하고 어둡기만 한 것인가? 무질서 속에서 더 큰 질서를 찾으려 하고 어둠 속에서 창조의 빛을 감지하려는 최근의 ‘카오스(Chaos)’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우리가 길을 잃었을 때 처음 출발했던 곳으로 되돌아가듯이 인간이 위기에 빠졌을 때 신화를 성찰하게 되는 경우의 좋은 실례라 할 것이다.
미스터 혼돈! 그대는 아직 건재한가.이제 태초의 그 순간처럼 다시 힘을 발휘할 때이다.
/글 정재서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천산이라는 곳은 금과 옥이 많이 나고 푸른 웅황도 산출된다.영수가 여기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양곡에 흘러든다.이곳의 신은 그 형상이 누런 자루 같은데 붉기가 빨간 불꽃 같고 여섯개의 다리와 네 개의 날개를 갖고 있으며 흐리멍덩하게 얼굴이 없다.가무를 이해할 줄 아는 이 신이 바로 제강이다.
-산해경 서차삼에서-
*곤륜산의 서쪽에 어떤 짐승이 있는데,그 모습은 개와 같고 긴 털에 다리가 넷이다.곰 같기도 한데 발톱은 없다.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걸어도 나아가질 못하며 두 귀가 있으나 듣질 못한다.그러나 사람을 보면 그가 어디로 갈지를 알았다.배가 있으나 오장이 없고 창자가 있으나 구불구불 하지 않아 음식이 곧바로 내려갔다.누군가 덕행이 있다고 하면 가서 들이받고 못됐다고 하면 졸졸 따라 다녔다.하늘이 그렇게 만든 것으로 이름을 혼돈이라고 한다.홀로 살며 특별히 하는 일은 업는데 항상 자신의 꼬리를 물고 빙빙 돌다가 하늘을 보고 웃곤 한다.
-신이경 서황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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