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 잠에서 깬 남자가 도자기 작업을 하고 있는 연인의 뒤로 다가가 애무를 하기 시작한다.축음기에서는 라이처스 브라더스의 ‘언체인드 멜로디’가 흘러 나오고, 분위기는 바야흐로 무드 만점.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남자가 할리우드의 매력남 패트릭 스웨이지 대신 ‘총알 탄 사나이’의 할아버지 레슬리 닐슨이었다면?
패러디는 모방이지만 다른 감독의 작품에 존경의 뜻을 표시하기 위한 오마주(경배)와도 다르다.
패러디는 단순한 조롱이 아니고 역설적인 차이를 만들어내 영화 만들기가 무엇인가 성찰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상업주의에 물든 헐리우드를 풍자한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플레이어’같은 영화처럼.)
따라서 패러디는 일회용 웃음이 아니며 뒤집어 볼수록 전복적인 도발이 함께 하는 것이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웃음이란 정상적인 것과의 차이를 인식할 때, 그리고 그 긴장이 이완될 때 느끼는 기분좋은 감정이다.
흔히 사람들은 관습의 틀을 깨는, 그래서 우리가 ‘정상이라고 생각했던 어떤 틀’로부터 심리적 간격을 느끼게 될 때 웃음 보따리와 마음 보따리를 동시에 풀게 된다. 관객들로서는 기존 영화를 볼 때는 적극적으로 동일시가 되던 주인공이나 사회도 패러디의 만화경으로 비추어보면 이지러지고 비틀린 요지경 속 관찰 대상이 돼버리고 만다.
바로 ‘총알 탄 사나이’의 웃음 속에는 할리우드의 스타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환상에 대한 전복이 담겨 있다.
이러한 면에서 요즘 개봉된 ‘재밌는 영화’는 대한민국에서도 패러디 영화가 본격화되었다는 신호탄이 될만하다.
‘쉬리’를 시작으로 ‘약속’ ‘간첩 리철진’ ‘주유소 습격사건’ ‘서편제’등등 90년대 들어 관객의 사랑을 받았던 한국 영화들을 총 망라하여 패러디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재밌는 영화’의 출현은 이제 한국 영화가 하부 텍스트로서 패러디 영화를 거느릴 만큼 영향력있는 매체로 발돋움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흥행도 잘된다니 패러디하는 의도를 찾아내어 적극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관객의 능력, 즉 문화적 층도 두꺼워졌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동시에 ‘재밌는 영화’는 ‘무서운 영화’류의 할리우드 패러디 영화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그대로 드러내기도 한다.
일회용의 허탈한 웃음만을 추구하는 ‘볼 때만 재밌는 영화’. 풍자와 비판적인 거리를 두는 전복 대신 원작 베끼기에 급급한 창의성 부재 말이다.
문득 현대의 몰리에르라던 극작가 닐 사이먼이 했던 말이 기억난다.
“슬픔을 염두에 두지 않은 웃음이란 없다.”
일련의 할리우드 코미디는 동명의 스탠리 큐브릭 작품을 패러디한 작년작 ‘2001년 스페이스 오딧세이’처럼 초창기 신선한 비판정신을 소진해버린 채 이제는 쇠퇴일로를 걷고 있다.
패러디는 동화작용 대신 이화작용을, 맹목 대신 성찰이 가능케 해야 한다. 그러한 면에서 할리우드 패러디는 한국 영화의 모델이 아니라 타산지석감이 아닐까?
‘재밌는 영화’는 볼 때만 재미있는, 원작 베끼기에 급급한 영화가 됐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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