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후보의 당선은 정치적 파란이다. 민주당 순회 경선 시작 후 불과 50여일. 초반만 해도 그가 집권여당의 대통령 후보로 결정될 수 있을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그런 만큼 정치지도자로서 그는 아직까지 ‘미지’의 인물로 여겨진다. 노 후보의 성향과 정치노선, 그를 둘러싼 몇몇 논란들을 집중점검한다. 노무현 후보는 1988년 정계진출 후 청문회 스타 등으로 정계에서 일약 급부상했지만 이는 ‘인간 노무현’으로서 일반인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탓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가족과 친구, 지인 등에게 비쳐진 노 후보의 초상은 여러 단어로 묘사된다.
‘영특’ ‘당돌’ ‘반항’ ’타협 거부’ ‘뛰어난 언변’ ‘가난 컴플렉스’ 등이 그것들이다. 1946년 경남 김해군 진영읍 본산리 봉화부락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적 ‘노 천재’로 불릴 만큼 두뇌가 영리했다.
노 후보의 작은 형인 건평(健平 ㆍ60)씨는 “동생이 여섯 살 때 천자문을 완벽히 외워 주위를 놀라게 했다”고 말했다.
형의 말임을 감안하더라도 “중학교는 물론 부산상고 시절에도 장학금을 받고 다녔다”고 한 것은 사실에 해당한다. 실제로 부산상고는 전국의 가난한 수재들이 몰려든 명문으로 꼽히기도 한다. 한 중학 동창도 “당시 왜소한 체구에 외모는 볼품이 없었으나 머리는 비상했다”고 말했다.
노 후보의 당찬 기질은 학창시절에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중학교 2학년 때의 ‘이승만 대통령 작문 사건’이 단적인 예. 당시 학교에서 3ㆍ15 부정선거를 한 달 앞두고 ‘이승만 대통령’을 주제로 글짓기를 시키자 그는 급우들을 부추겨 모두 백지를 제출토록 했다.
고교시절 소풍에서 친구들과 함께 어울린 노무현(왼쪽 두번째) 후보.
담임 교사의 추궁에, 그는 “특정 후보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부정선거 행위가 아니냐”고 대들었다고 한다.
형 건평씨는 “2주일 정학처분을 받고도 반성문을 끝내 쓰지않았다”고 말했다. 대창초등학교 시절 붓글씨 대회에서 옆반 친구가 부정한 방법으로 1등을 하자, 자신의 2등상을 반납한 사건도 그의 고집스런 면모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부산상고 동창인 김철중(한국동도공업㈜ 전무)씨는 “노 후보가 변호사 시절, 내가 폐수방류혐의로 구속될 처지에 놓여 도움을 요청한 적이 있다”며 “그러나 그는 ‘노동ㆍ환경 범죄는 사회악인 만큼 법대로 처벌을 받으라’며 매몰차게 거절했다”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에게는 ‘불의’를 수용하지 않으려는 비타협적 기질이 뚜렷했던 것 같다.
그의 기질은 정계 입문 후에도 드러난다. 1989년 당시 여당인 민정당의 불참으로 5공 특위와 광주특위 청문회가 파국을 맞자 의원직 사퇴를 전격 선언한 것이나, 90년 3당 합당 때 정계입문의 인연을 맺은 김영삼 당시 총재를 따라가지 않는 것은 그의 ‘소신’때문이었다.
이런 속성은 변호사 시절 일에 대한 그의 근성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문재인(文在寅) 변호사는 “노 후보는 변호사 시절 국가보안법 조작사건인 ‘부림사건’을 수임한 뒤부터 민주화운동에 뛰어들게 됐다”면서 “그는 학생들이 읽었다는 ‘전환시대의 논리’등 수십 권을 독파한 뒤 변론에 임할 만큼 열성적이었다”고 말했다.
리더십과 뛰어난 화술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그의 자질이다. 누나 영옥(64)씨는 “동생이 초등학교 6학년 때 전교 어린이 회장에 출마했는데, 읍내 학생들의 텃세가 심했다”면서 “동생은 ‘작은 고추가 맵심더’라는 뛰어난 말솜씨로 학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회상했다.
노무현후보와 부인 권양숙(왼쪽)씨.아들 건호(29)씨.딸 정연(27)씨의 최근가족사진.
마을 후배인 이재우(진영농협조합장)씨도 “인근 마을 청년 30여과 집단 패싸움을 벌일 뻔 했는데, 무현이 형이 혼자 상대해 말로써 이들을 굴복시켰다”고 전했다. 대담하고 말발 좋은 성품은 지금도 여전하다는 게 주변의 평이다.
그러나 가난에 따른 피해의식과 열등감, 이로 인한 반항적 태도는 그에게 지울수 없는 상처로 남아있다. 그의 집안은 원래 전답이 4,000평이나 될 만큼 부유했으나, 6ㆍ25 전쟁 후 큰 형의 대학 등록금 등을 대느라 가세가 급격히 기운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같은 세대가 겪었듯이, 초등학교 시절 10리나 떨어진 읍내 학교까지 맨발로 걸어 다녔고, 기성회비를 제때 못 냈다는 이유로 벌을 서고 창피를 당하곤 했다. 고교동창인 김동백씨는 “무현이는 부산상고 시절 친구 집을 전전하고, 교실 바닥에서 새우잠을 잤다”고 말했다. 그가 친구들과 어울려 술과 담배를 배우며 방황하던 시기도 이 무렵이다.
1966년 고교 졸업후 그가 사법고시로 방향을 튼 것도 이같은 가난 콤플렉스와 무관치 않다. 노 후보 또한 자서전에서 “나의 잠재의식 속에 어떻게 해서라도 가난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열망과 함께 모두가 가난하지 않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막연한 꿈이 심어졌던 것 같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그는 결국 1975년 17회 사법고시에 합격, 지긋지긋한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지금도 노 후보에게 간혹 급진성이 엿보이는 것은 이런 삶의 궤적이 투영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많다.
박정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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