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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떠나라…내 삶을 실감하고 싶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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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떠나라…내 삶을 실감하고 싶다면"

입력
2002.04.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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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파도로 지은 城떠나고 싶다. ‘이곳’ 아닌 곳에서 몸을 뉘고 싶다. 잠시만, 잠시만.

일상과 사람에 지쳤을 때 낯선 곳에 대한 간절한 욕망이 솟는다. 김화영(60) 고려대 불문과 교수에게 여행은 낯선 곳의 풍광을 넘어 새로운 잠자리를 뜻하는 것이었다. 다른 삶을 체험할 수 있는 새로운 현재와 새로운 공간.

“나는 어디를 가나 신기한 것, 아름다운 것을 구경하는 일보다 삶이 더 중요했다. 남들의 기이한 삶, 뜻있는 삶을 바라보는 것도 흥미롭지만 그 이상으로 ‘지금 여기서 나는 살고 있다’는 것을 몸으로 실감하는 일이 필요했다.”

그래서 김교수는 훌쩍 여행을 떠났다. 1974년 4월 어느날, 프랑스 프로방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알베르 카뮈의 무덤가를 찾았을 때였다.

“여기 수선화처럼 다사로운 작은 돌이 있다. 이 돌은 모든 것의 시작에 놓여 있다”고 말했던 알베르 카뮈. 김교수의 여행은 그 돌로부터 시작됐다.

‘김화영의 예술기행’이라는 부제가 붙은 책 ‘시간의 파도로 지은 城(성)’(문학동네 발행)은 그의 느린 여행 기록이다.

프랑스 북쪽 부르타뉴에 있는 샤토브리앙의 콩부르성, 거인 프랑수아 라블레를 낳은 작은 집인 라 드비니에르, 사랑의 폭풍으로 지은 조르주 상드의 노앙 성, ‘골짜기의 백합’을 낳은 오노레 드 발자크의 사셰성을 천천히 걸으면서 그는 몇 세기 전 예술가의 삶을 더듬는다.

파리로 왔다. 개선문이 파리의 여행자를 맞는다. 레마르크의 소설 제목, 빅토르 위고의 유해가 머물렀던 곳, 제2차 세계대전 후 파리에 입성하는 연합군을 맞은 문. 여행자는 파리의 도시구조에서 역대 통치자들의 정신적 그릇을 본다.

루이 14세, 재상 콜베르, 도시 설계사 르 노트르가 내린 지혜로운 결정들이 오늘날 아름다운 파리를 이루었다.

“루브르궁에 이어진 튈르리 공원으로부터 출발해서 콩코르드 광장의 뾰족한 오벨리스크를 거쳐 개선문에 이르는 광대한 일직선은 파리라는 도시 구조의 척추에 해당한다.”

‘달빛 속의 대사원’ 노트르담, ‘예술이 정복한 왕궁’ 루브르 등 김교수가 들른 장소마다 붙인 이름도 아름답다.

여행자는 무능(無能 )이 죄가 되지 않는 나라, 인도로 간다. 그는 인도의 사원에서 신(神)을 만진다. 그것도 발바닥으로.

“사원 입구에서 신을 벗고 들어가야 하는데 맨발에 닿는 흰 대리석의 감촉이 여간 신선하지 않다. 거의 에로틱할 정도다. 발바닥의 에로티즘을 신들은 알고 있는 것일까?” 인도인은 손가락으로 만지면서 음식을 먹고 사원에서는 발바닥으로 신의 공간을 애무한다.

아프리카로 간다. 인간의 손때가 가장 적게 묻은 대륙에서 그는 일생 처음으로 ‘아무 부담도, 숙제도 없는 홀가분한’ 여행을 체험한다.

김교수는 눈부신 미문을 자랑하는 저술가이기도 하다. 여행자의 예술적인 통찰도 소중하거니와, 문장 하나도 그냥 지나치지 못할 정도로 아름답다.

그는 “생전 처음 가보는 곳에 대한 흥미보다는 전에 이미 가보았던 곳에 또 가보는 반복 속의 변화를 더 좋아한다”고 했다. 다시 가 보면 모든 것이 전과 똑같다는 느낌을 주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대개는 뭔가 변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변화와 공간의 접촉, 즉 내게 구체적인 삶의 살과 그 변화를 만지고 있다는 실감,” 그것이 여행이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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