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TV에서 최근에 번역된 모리스 루블랑과 코난 도일의 탐정 소설에 대한 프로그램을 보았다. 출연진의 논의 중에 우리나라에서는 왜 탐정 소설이 큰 인기를 끌지 못하는지 의문이 제기됐다. 출연진이 나름대로 이런저런 이유를 제시했지만, 별로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았다.한 사회에서 고전적인 의미의 탐정 소설이 인기를 끌기 위해서는 사회가 어느 정도 합리화되어, 살인 동기까지도 합리적인 설득력을 지녀야 한다. 탐정이 합리적인 추리를 통해 살인의 동기와 정황을 재구성할 때 독자가 흥미를 느껴야 그 탐정소설이 읽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은 그만큼 합리적이지 않고,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것도 시스템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탐정 소설이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기 어려운 것이다.
올해 들어 우리가 목도하는 정치 현상들도 우리 사회가 합리성보다는 열정에 쉽게 휩싸이는 사회임을 입증하고 있다. 한나라당 이회창씨 인기의 급전직하, 민주당 이인제씨의 추락과 노무현씨의 급상승, 대통령 아들들과 연관된 각종 게이트가 불거지면서 다시금 세가 결집되는 이회창씨 진영의 모습 등 하루가 멀다 하고 정치적 풍경이 변해 간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의 부침을 좌우하는 것이 매우 유동적인 이미지라는 점이다. 물론 ‘노풍’의 이면에, 혹은 이회창씨에 대한 지지 뒤에 어떤 계층적 토대나 정치적 성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들이 구체적인 정책이나 우리 사회 건설의 밑그림을 가지고 다투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저 한쪽에 이회창씨의 대쪽 이미지가 지닌 양면성, 그러니까 꼿꼿함과 오만함 사이의 시계추 운동이 있다면, 다른 쪽에는 개혁적인 깨끗함과 이데올로기적 과격성 이미지 사이의 왕복 운동이 있었을 뿐이다.
이미지와 슬로건에 휩싸이는 이런 열정의 사회가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실 우리 사회 발전의 원동력은 ‘열정’에 있었고, 그 열정이 낳은 ‘동원’에 있었다.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겠지만 지난 몇 십년 간 우리 사회가 이룩한 민주화와 경제발전의 원동력 역시 열정과 동원이었다. 이런 열정과 동원의 힘은 스포츠 영역에서도 표출되었다. 두드러진 예가 88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였다. 그 만큼의 열정을 가진다면 월드컵의 성공적 개최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열정이란 것은 합리적으로 배분되지 않는 법인지, 지금 달포 밖에 남지 않은 월드컵은 사람들의 모든 관심을 흡수하는 정치 세계의 우레와 폭풍에 떠밀려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는 형국이다. 언젠가 우리 사회가 더 발전하면 정치는 정치 나름의 논리대로 진행되고, 월드컵 같은 행사는 또 그대로 운영되는 사회, 각각의 시스템에 의해 운영되는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다. 지금부터라도 우리는 열정을 통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예컨대 각종 게이트와 관련된 불법과 비리를 빨리 법대로 처리하고 우리 열정 가운데 필요한 만큼은 월드컵에 쏟아야 할 때이다. 웬만큼 시스템이 갖추어진 사회에서조차 월드컵 같은 큰 행사를 제대로 치르기 위해서는 상당한 동원이 불가피한 법인데, 우리는 지금 그만큼의 관심이나 기울이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물론 다음달에 월드컵이 개막되면 그것은 우리의 모든 관심을 흡수할 것이다. 월드컵의 열기가 차 오르면 정치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질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그것은 그것대로 문제를 낳을 것이며, 월드컵은 월드컵대로 준비 부족의 난맥상을 드러낼 위험이 많다. 우리가 가진 열정의 고삐를 잡는 지혜를 배우는 데 월드컵은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김종엽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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