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완연한 대선국면이다. 여야 모두 아직 후보경선이 끝나지 않았지만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 없다. 선거는 아직 8개월이나 남았으나 민주당의 노무현씨와 한나라당의 이회창씨가 사실상 전투에 돌입했다. 이에 따라 관심은 현재 여론조사에서 우위를 보이고 있는 노무현씨의 바람(盧風)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정말 표로 이어질지 등에 쏠리고 있다.‘노풍’은 분명 12월 대통령 선거를 내다보는 주요 변수이긴 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대선구도가 빠른 속도로 ‘인물 중심’으로 옮겨가고 있으나 아직 3김 정치와 지역구도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어 ‘판세 읽기’를 어렵게 한다.
하지만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평범한 말을 되새겨보면 대선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최근의 우리 정치사를 되돌아보면 여든, 야든 분열하는 쪽이 패배하는 패턴을 보여왔기 때문이다.
1980년 ‘서울의 봄’부터 시작해보자. 물론 신군부 세력이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이후 꾸준히 권력찬탈의 수순을 밟아왔지만 국민적 지지 속에 권력이양의 대상자로 거명됐던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씨 등 세 정치인은 제 갈 길로만 갔다.
1987년의 대선에서도 여권에서는 전두환씨의 후원으로 노태우씨가 후보로 나선 데 비해 야권에서는 또 3김씨가 나란히 대선에 나서는 등 분열의 양상을 보였다. 또 1992년의 대선은 어땠는가? 김영삼 김종필씨가 3당합당으로 여권에 합류하고 김영삼씨가 단일후보로 나선 반면 야권에서는 김대중씨 외에 정주영 박찬종씨까지 가세하는 등 분열 현상을 연출했다.
어쩌면 ‘야권 분열’ 은 20세기 초반 근대정치의 첫 모습으로 공산주의 운동이 시작된 이래 전통이기도 했다. 독재권력 아래서 정권교체가 이루어지지 못한 데는 물론 여권의 폭압적 수단도 있었지만 정치적 고비마다 거의 예외없이 등장했던 야권 분열의 탓도 있다.
하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그와는 정반대인 ‘여권 분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1987년 전두환씨에서 노태우씨로 정권이 넘어갈 때 전씨는 “나를 밟고 지나가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국민적 저항에 가깝도록 등을 돌린 민심을 추스리기 위해 ‘현직 대통령과의 차별화’를 허용한 것이다.
그러나 전씨의 인내로 인해 당장 여권이 분열되지는 않았다. 1992년의 대선에서 김영삼씨는 역시 현직 대통령인 노태우씨를 비판하면서 차별화를 시도했고 노씨는 탈당의 수단으로 응수했다. ‘여권 분열’의 조짐이 나타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1997년의 선거는 종전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로 진행됐다. 여권에서는 역시 이회창씨가 현직 대통령 김영삼씨를 비판하면서 차별화를 시도했고 오랫동안 김영삼씨를 지지해온 상도동 세력 및 부산ㆍ경남의 민심이 이회창씨로부터 멀어졌다. 즉, ‘여권 분열’ 현상이 가시화한 것이다.
이인제씨가 여당에서 나가 500만표를 얻은 것에는 분명 이에 힘입은 측면이 강하다. 이에 비해 당시 야권은 ‘반YS’라는 정치적 이해에 따라 김대중 김종필씨 등 절대 협력할 것 같지 않았던 정치인들이 뭉쳐 ‘야권 단일화’를 이룩했다.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그러면 이번의 대선은 어떻게 될까? 우선 야권은 이미 갈라지기 시작했다. 김종필씨가 여전히 이회창씨와는 다른 길을 모색하고 있고 박근혜씨는 한나라당을 나와 단독출마의 길을 걷고 있다. 또 정몽준씨 역시 ‘독자적 생존’을 암중모색하고 있다.
반면 여권은 최소한 외면적으로는 아직 괜찮다. 하지만 이인제씨가 민주당에서 마음이 멀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보다도 정작 중요한 것은 노무현씨가 여권의 대선후보로서 김대중 대통령과 어떤 관계를 설정하느냐에 달렸다.
아직은 노씨가 현직 대통령과의 차별화를 거부하고 있지만 득표에서 불리하다고 보면 언제 달라질지 모른다. 노씨와 동교동 세력의 결속이 깨지는 날, 여권은 정말로 분열되는 것이다. 표를 얻자니 현직 대통령을 비판해야 하고, 그러자니 여권이 깨지는 딜레마를 여권이 어떻게 해결할지 아주 궁금하다.
신재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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