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 평화상까지 수상한 헨리 키신저(78) 전 미국 국무장관이 여든을 코 앞에 둔 나이에 전쟁범죄 및 인권유린 문제에 휩싸였다.1969~75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 때 국가안보 담당 보좌관으로, 73~77년 닉슨과 제럴드 포드 대통령 때 국무장관을 지내면서 현대사의 고비고비마다 내렸던 결정이 뒤늦게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아르헨티나 칠레 스페인 프랑스 미국 등의 법정에서 문제로 제기된 부분은 60~70년대 미국이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폭격, 민간인을 대량살상하고, 남미 군사독재 정권의 반정부 인사에 대한 살해ㆍ납치ㆍ고문행위를 지원하는 과정에서 그가 한 역할에 집중돼 있다.
특히 24일 영국 런던에서는 경제 관련 국제회의에 참석한 키신저를 체포하려는 시도까지 나타났다. 인권운동가들이 런던 치안법원에 그에 대한 체포영장 발부를 요청한 것이다.
이 요청은 “검사가 정식으로 청구할 사안”이라는 이유로 기각됐지만 인권단체 회원 200여 명은 회의장 앞에서 “키신저는 전범” “키신저를 교도소로”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했다. 자칭 ‘키신저 체포조’는 그의 허수아비를 세워놓고 모의재판을 하기도 했다.
키신저는 지금까지 자신과 관련된 문제 제기에 대해 “사실 무근”이라고 일축해 왔다. 그러나 이날 회의 연설에서는 “최고위급에서 이뤄지는 결정은 대부분 (찬반이) 51대 49인 결정이므로 실수했을 개연성은 매우 높다”며 “누구도 자신이 일한 정부가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밝혀 잘못을 인정하는 듯한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문제는 30년이 지난 시점에서 법정이 판단을 내릴 적절한 수단인가 하는 점”이라고 단서를 달아 사법적 판단은 거부했다.
■ 키신저 관련 사법사안
20세기 외교의 풍운아였던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의 발목을 잡고 있는 사법적 사안은 현재 네 가지이다.
가장 직접적인 것으로는 1970년 9월 살해된 칠레 육군사령관 레네 슈네이더의 유족이 작년 9월 워싱턴 법원에 낸 소송이다.
당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87) 장군을 중심으로 한 쿠데타 세력이 사회주의자인 살바도르 아옌데(나중에 대통령이 됨)를 지원하는 슈네이더 장군 등을 납치하려는 음모를 꾸몄고 미 중앙정보국(CIA)이 이를 후원했으며 키신저가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주장이다.
프랑스의 소피-엘렌 샤토 판사는 최근 73~90년 칠레에서 프랑스인 5명이 실종된 사건을 조사하면서 피노체트 독재정권을 지원한 혐의를 받고 있는 키신저를 신문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영국 당국에 공식 요청했다.
스페인의 발타사르 가르손 판사도 지난 주 70~80년대 칠레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브라질 파라과이 우루과이 등 남미 6개 국 독재정권이 결탁해 반정부 인사 암살에 공동보조를 취한 ‘콘도르 작전’을 수사하면서 국제형사경찰기구(인터폴) 런던 지부에 키신저를 증인 자격으로 신문할 수 있도록 해 줄 것을 요청했다. 가르손 판사는 98년 영국을 방문한 피노체트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한 인물이다.
아르헨티나와 칠레 법원도 작년 8월 ‘콘도르 작전’ 조사 과정에서 키신저에게 증언을 요구했다.
이광일기자
ki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