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대 후반으로 기억한다.미국의 석학 존 케네스 갈브레이스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퀸스 칼리지 졸업식에서 축사를 했다.
흔히 덕담으로 일관하는 졸업식 축사치곤 예사롭지 않은 내용이다. 요지는 대충 이렇다.
“상류층 출신에 재능도 뛰어난 당신들은 잘 먹고 잘 살게 마련이다. 그렇게 한 평생 사노라면 도무지 권태로울 것이다. 그 불운을 딛고 인생을 즐기려면 좌파가 되라. 잘 나고 가진 자들의 지배논리를 비판하고, 약하고 못 가진 자를 위해 정의를 대변하는 것 만큼 재미와 보람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갈브레이스는 케인즈의 국가 개입주의 전통을 잇는 학문적 적자(嫡子)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이 당대의 석학은 하바드 대 교수를 지내다 케네디 대통령의 보좌관이 됐으나, 케네디 암살로 학자적 경륜을 현실에 펼칠 기회를 함께 잃었다.
그 뒤 1980년 대를 지배한 레이거노믹스와 대처리즘의 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을 비판하는 양심적 개혁 진보 세력의 기둥 역할을 했다.
이런 면모에 비춰 ‘좌파가 되시오’라는 권유는 젊은 날의 이상과 정의감을 실천하라는 평범한 충고에 다름없다.
다만 그 독특한 논법이 일가를 이룬 석학답게 비범하다.
그러나 ‘좌파’ 규정이 대역죄 고변에 버금가는 매도(罵倒)인 우리 사회 기준으로는 경사(慶事)에 악담을 늘어놓은 꼴이 된다.
그만큼 우리의 안목과 인식이 협소하고 졸렬한 것이다.
좌파는 곧 친북이라는 이념의 굴레에 오래 얽매인 탓이지만, 북한이 저 지경으로 전락한 이제는 지독한 좌파 알레르기를 스스로 치유할 때도 됐다.
우리가 숭상하는 앵글로 색슨권의 대표적 지성이 그 사회 엘리트들에게 ‘좌파가 되라’고 권한 지도 10여 년이 지난 마당에, 유력한 대통령 후보를 좌파적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그 ‘좌파적’ 후보를 여론이 지지하는 사실은 이제 좌파는 북한과 연계된 불온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사회경제적 문제에 대한 접근 방법 차원에서 보는 변화를 느끼게 한다.
갈브레이스의 축사를 들은 그 케임브리지 졸업생들이 주도한 영국은 냉전 종식 뒤의 격변을 거쳐 좌우 이념과 정책을 수렴한 이른바 ‘제3의 길’이 득세했다.
좌파 노동당이 거센 신자유주의 물결에 편승, 우파적 정책을 들고 나와 집권한 것이다.
영국보다 좌파 성향이 훨씬 강한 독일과 프랑스 등 유럽 대륙의 좌파도 비슷한 궤도 수정을 통해 잇달아 집권, 한동안 서유럽의 정치 지형이 온통 좌파의 상징 붉은 색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서유럽의 좌우 세력 판도는 일견 다시 오른쪽으로 기우는 형세다.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 우파가 집권하고 오스트리아와 덴마크 등에서는 극우파까지 발호하고 있다.
지난 일요일에는 프랑스 대통령 선거 1차 투표에서 악명높은 극우파 장-마리 르펜이 집권 좌파의 조스팽 총리를 제치고 결선에 진출, 서유럽 전체에 일대 지진과 같은 충격을 던졌다.
독일에서도 6월 연방 총선의 지표로 평가된 작센 안할트주 총선에서 집권 좌파 사민당이 우파 기민당에 참패, 미국에서 시작된 보수 우경화가 확산 일로라는 분석도 나온다.
그러나 ‘유럽 좌파의 퇴조’ 를 떠드는 것은 성급하다.
당장 실패한 것은 좌파 정치세력이지만, 늘 좌우 균형을 이루는 프랑스 유권자들은 낡고 부패한 기성 정치 자체에 벼락을 내렸다는 평가다.
극우파만 뜬 게 아니라, 체제 전복을 외치는 극좌파 후보까지 약진한 것이 증거다.
좌우 성향 유권자 모두 어정쩡한 중도 정치에 반발, 색깔이 분명한 후보를 지지하는 시위를 감행했다는 것이다.
조스팽은 신자유주의적 정책으로 경제를 도약시켰지만, 친 시장적 정책이 분배 정의와 복지 등을 퇴보 시킨 것이 함정이 됐다는 얘기다.
프랑스 대선의 교훈은 좌우파를 가림 없이 늘 신선한 상상력과 현실 인식으로 개혁과 변화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언제나 중도 우파를 유일한 정답으로 여기는 이 땅의 정치인들도 우리 사회의 이념적 지평이 변하고 있음을 바로 봐야 한다.
본디 좌우가 나란히 경쟁하는 것이 정상 사회라고 했다.
강병태 편집국 부국장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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