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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네모난 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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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네모난 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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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4.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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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모난 뱀이 나타났다. 신문과 방송에 났다.생태계 보고인 지리산에서 길이 10㎙, 몸통 1㎙인 뱀을 보았다는 보도가 있었다.

첫 보도를 접한 사람들이 언론사에 항의했다. 요즘 세상에 10㎙짜리 뱀이 어디 있냐고.

들어보니 좀 지나쳤다 싶었다. 길이를 8㎙로 수정했다. 항의는 그치지 않았다. 5㎙로 줄여서 보도했다.

항의의 관성(慣性)은 이어졌다. 신문과 방송은 자체 회의를 거듭했고, 뱀의 길이는 조금씩 줄어 들었다.

최종 보도에서 뱀의 길이는 1㎙로 됐다. 드디어 항의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그런데 아차, 네모난 뱀이 돼버린 것이다.

길이 1㎙ 몸통 1㎙라면 네모난 뱀(정확히 말하면 지름과 높이가 같은 원통형 뱀)이 아니고 무엇인가.

지리산에는 아직도 이렇게 큰 뱀이 살고 있다는 취지의 기획성 보도가 지리산에 가면 네모난 기형의 뱀을 볼 수 있다는 턱없는 가십성 기사가 돼 버렸다.

몇 년 전 미국 워싱턴에 있을 때 북한 핵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방미한 북한 고위 관계자 가운데 모 인사가 우리측 기자들에게 해준 얘기다.

그는 식사 도중 “야, 니네들 네모난 뱀 잡았다면서. 신문과 방송에 났어야. 좀 보여 달라우”라면서 입에 침을 튀기며 껄껄댔다.

당시 우리는 아무도 그를 따라 웃지 못했다.

그가 우리 언론의 보도과정을 너무나 속속들이 알고 있기도 했지만, 우리 사회의 일부 기형화한 모습을 적확하게 찔러댔기 때문이었다.

우리 나라에는 네모난 뱀이 참 많다.

여러 변수가 복합돼 있는 사안에서 문제가 된 어느 한 면만을 두드려 맞추다 보니 전체가 기형화, 희화화(戱畵化)하고 있는 것이다.

과다하게 설정된 목표, 결여된 자신감과 의지, 그래서 나타나는 주변 눈치보기, 쉬 변경되는 방침이 문제의 시작이다.

보다 심각한 것은 수정 개선하는 과정에서 전체를 잊고 항의와 비난 피하기에 급급해 그 타깃만을 기형적으로 바꾸다 보니 본래의 목적과 전혀 다른 웃기는 결과가 돼 버리는 것이다.

1990년대 이후 우리는 많은 것을 알게 됐다. 정보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공개되고 자유로운 의사 표현이 충분히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스스로 알게 된 것과 상대방이 하는 짓이 상반되면 거침없이 항의하고 비난했다. 하는 주체는 아는 쪽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알고 항의하는 쪽의 공격을 피하는 데 급급하다 보니 원래 하던 일의 원칙과 본질은 뒷전으로 밀리는 경우가 많았다.

금융실명제의 혼란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고, 최근의 기업 구조조정, 공기업 민영화 등에서도 네모에 가까운 뱀들이 나타나고 있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본래의 목적을 잊게 하는 행태가 나타났으며, 뒤늦게 따라가는 한나라당 경선도 네모난 뱀 형태로 가고 있다.

항의를 받는 대목, 국민의 눈치가 보이는 부분에서 ‘항의와 눈치’만을 삭제해 가기 때문이다.

과욕으로 10㎙라고 보도했다면 당연히 수정해야 한다.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필연적으로 수반돼야 하는 1㎙에 대한 인식이다.

10㎙와 1㎙의 거대한 뱀이 1㎙와 10㎝의 크지 않은 뱀으로 되는 것은 참을 수 있다. 그러나 네모난 뱀은 참을 수 없다.

정병진 여론독자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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