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천씨의 시집 ‘눈물은 푸르다’(시와시학사 발행)를 읽었다.책 날개의 저자 소개에 따르면 시인은 48세이고, 노동현장에서 노동과 문화를 주제로 시를 써왔다고 한다.
그러니 최종천씨는 노동자 시인이다.
그러나 ‘눈물은 푸르다’는 예컨대 박노해나 백무산 같은 이름을 통해 1980년대와 90년대 초 시 독자들이 익숙해져 있던 노동시들과는 다르다.
이 시집의 몇몇 아름다운 시들은 전통적인 노동시 독자들이 ‘소시민적’이라고 백안시할 정서로 출렁인다.
예컨대 ‘노을/ 번지는/ 물감’이 있는 아틀리에의 ‘한 그릇의 고요’가 ‘밀도높은/ 공기를 퉁기는/ 퉁기는 기타’와 ‘애무를 받으며/ 신음하는/ 프리지어’에 의해 ‘엎질러지’는 순간을 사진 찍듯 그린 ‘아틀리에’나, 돌이 있는 시내 풍경을 ‘돌 사이를 물이 돌돌돌/ 물 사이를 돌이 돌돌돌/ 서로를 벗기며 핥는 소리/ 돌은 콘돔을 끼고 있다’고 극히 감각적으로 형상화는 ‘돌ㆍ5’ 같은 작품들이 그렇다.
‘눈물은 푸른 색을 띠고 있다/ 멍을 우러낸 것이기 때문이다’로 시작하는 표제시 ‘눈물은 푸르다’도 열린 눈의 막막함이나 약속의 허망함 같은 것을 다소 수동적으로 수납하고 있다는 점에서 크게 보면 이 부류의 시에 속한다.
변혁의 전망이 흐릿한 시대의 노동자가 쓰는 시에서 목소리의 새됨이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종천씨의 좀 더 산문적인 시들은 당파적으로 단호하다.
그것은 우리가 흔히 문화나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의 폭력성과 헛됨을 겨눈다. 시인이 보기에 ‘자연에서 한 마리의 사자가 한 마리의 노루를 사냥하면/ 그것은 자연 전체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다른 인간을 착취하면/ 그렇게 집중된 부는 결국 문화의 형태로 돼 버린다/ 문화의 양이 그만큼 늘어나는 것 그뿐이다/ 인간은 질을 통하여 소생할지라도/ 양을 통하여는 사멸에 이를’(‘잔업 시간’) 것이고, ‘富의 내용은 문명이나 예술/ 예술이 만들어 내는 상품이나 문화 따위가 아니다/ 富는 손상되지 않은 자연과/ 소외되지 않은 노동이다’(‘富란 무엇인가?’).
그러나 현실은 ‘교회나 성당 불당에 나가/ 십자가 앞에서 석가 앞에서/ 아들딸들의 합격과 출세 성공을 기도하’는 아버지와 어머니들로 그득하다. 그래서 예수는 쉬지 못한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 자기에게 주문서를 놓고 가’기 때문에 ‘그 많은 것들을 해주기 위해/ 일요일에도 일해야 하’(‘사랑이여)’는 것이다.
가난과 고독이 축복이 되는 시대를 그리워한다는 점에서 이 노동자 시인은 근본적 생태주의자다.
잠언적 울림을 주는 그의 한 시구처럼 ‘그의 몸은 그의 全集이다’(‘집’).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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