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비’를 만든 일본감독 기타노 다케시는 인터뷰에서 가족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보는 사람만 없다면 버리고 싶다.” 가족을 버리고 싶다고? 이 사람 제정신이 아니군! 하지만 당신은 가족으로부터의 탈출을 꿈꾼 적이 없는지.
적어도 카프카는 벌레로의 변신을 통해 가족과 일상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리고 그런 시도를 통해 너무나 익숙해 알지 못하던 많은 것들에 놀란다.
어느 날 아침, 평범한 샐러리맨 그레고르 잠자는 거대한 갑충으로 변해버린 자신을 발견한다. 한 회사원이 아침에 일어나 직장에 가려고 허둥대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
그러나 자기의 온몸이 벌레로 변한 대사건이 발생했는데도 오로지 지각만을 걱정한다면?
“최근 당신의 업무 성과는 무척 불만족스럽소.” 사장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제가 벌레가 된 관계로 출근을 할 수가…” 변명은 필요없다. 꿈틀거리며 기어서라도 나가야 한다.
내가 아니면 누가 가족을 지킬 것이며, 가족이 아니면 누가 나를 지키랴! 집이야말로 험한 세상의 폭풍을 막아주는 안식처다. 모두가 등을 돌려도 가족만은 내 편이다.
그러나 들뢰즈의 말처럼 카프카는 가족이 상업적, 관료적 외부세력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는커녕, “우리에게 닥쳐오는 악마적 세력들이 두들겨 대는 문”처럼 가족 외부에서 만들어진 욕망이 개인에게 스며드는 통로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물론 이와 다르게 말할 수도 있다. ‘변신’의 벌레는 근대 산업 사회에서 소외된 한 개인의 상징이며 그의 죽음은 가족마저 우리를 지켜주기는 역부족임을 증거한다고.
하지만 카프카의 벌레되기란 이런 종류의 통념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카프카의 작품에 빈번히 등장하는 갑충이나 원숭이 개 쥐 등은 존엄성을 상실한 왜소한 인간의 상징과는 무관하다.
또한 정신분석학의 주장처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따라 죄의식을 느끼는 개인의 무의식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말 그대로 그것은 변신에 관한 것이고 “내가 동물이 된다면”발생하게 될 사태에 관한 것이다.
카프카의 동물이나 벌레는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모습으로는 뚫기 힘든 막다른 벽에서 출구를 찾는 존재이다.
“저는 자유를 원치 않았습니다. 단지 하나의 출구만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변신은 심지어(!) 벌레가 된 주인공에게도 어떤 기쁨을 제공한다.
그런데 이 기쁨을 가로막고 격렬한 거부감을 표시하는 것은 다름 아닌 가족들이다.
어머니는 기절소동을 벌이고 아버지는 아들의 무른 등에 사과를 집어 던진다. 모두가 착실한 아들 대신 남겨진 벌레를 증오하며 그를 유폐시킨다.
이것은 단지 고약한 부모를 가진 불운한 개인의 일화가 아니다. 정해진 궤도를 이탈하려는 당신의 자유로운 발걸음에 가장 먼저 태클을 거는 것은 바로 가족이다.
“이게 다 너를 위한 거야”라고 하면서. 그 고착된 욕망의 가족그물에 걸려 쓰러지는 것은 아이들만이 아니다.
제대로 된 부모노릇을 위해 당신은 양심을 팔아 뒷돈 거래를 하고 아파트투기를 일삼는다. 수많은 불의와 냄새나는 욕망이 가족의 거룩한 성찬보로 가려진다.
그래도 당신은 가족, 그 눈물겨운 이름을 떨칠 수가 없을 거다. 물론 한 개인의 삶을 가족이 전적으로 책임지고 부담해야 하는 사회에서 이 절박한 가족애는 개인이 가진 성향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러나 가족을 위해 무엇도 불사하겠다는, 혹은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번듯한 가족만을 꿈꾸는 가족주의의 만연이 바로 가족의 위태로움을 가져온다면?
기백만원 하는 영어유치원에 고급과외, 조기유학까지 가족사랑의 신기루 속을 헤매다 아이가 튕겨나가고 부모가 쓰러지고 가족이 해체된다.
이것이 카프카가 100년 전 예견한 가족주의의 역설이다.
가족에 낯설고 불편한 시선을 던지는 것은 ‘변신’만이 아니다. 문학은 늘 집을 떠나면서 시작된다.
문학은 영혼의 모험, 언제나 가족적 지평을 너머 낯선 곳을 향하는 실험이다.
물론 집으로 향하는 길이 문학이 될 때도 있다. ‘오디세이’처럼 돌아가는 데 한 20년쯤의 모험이 필요하다면.
모험 후 도착한 곳이 예전과 완전히 달라진 집이라면. 따라서 그곳에는 또 다시 우리를 바꾸는 세계로의 모험이 있다.
그것이 바로 카프카가 ‘변신’에서 꿈꾸었던 것 아닐까?
/ 진은영(32) 시인, 수유연구실ㆍ연구공간 ‘너머’ 연구원. 이화여대 철학과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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