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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오럴 해저드

입력
2002.04.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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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럴 해저드(oral hazard)’라는 용어가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체제 진입 이후 우리에게 급속히 다가온 말 중에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가 있는데, ‘모럴(moral)’을 ‘오럴(입)’로 바꾼 것이다.보통 정책당국자의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무분별한 발언이 금융시장에 큰 혼란과 불안을 가져오는 현상을 말한다.

많은 경우 경제 현실을 똑바로 파악하거나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이 못 되는데도 잘 아는 것처럼 행동할 때 발생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뻔히 알면서도 특정 목적을 위해 모럴 해저드를 저지르는 경우도 있다. 선거철에 특히 심하다.

진념 전 경제부총리만큼 경제와 정치와의 관계에 대해 소신을 꾸준히 공개적으로 이야기한 각료도 드물다.

진 전 부총리의 주장은 한마디로 ‘정치 논리가 경제 논리를 지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정치인들과의 모임에서 이야기한 것을 제외하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방송에서 언급한 것도 한 두번이 아니다.

지난해 7월에는 “정치 불안이 경제 운용과 구조조정에 많은 영향을 준다”며 정치권에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올해 초에는 “경제를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려는 움직임에 제동을 걸 수만 있으면 경제 문제를 잘 풀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선거가 있는 올해 경제 정책의 최우선 과제는 ‘정치로부터의 독립’이라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조했다.

3월 뉴욕에서 열린 한국 경제 설명회에서 그의 출마 문제가 제기되자 그는 단호히 부정했고, 귀국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막판에야 “정치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공인으로서 당의 요청을 뿌리칠 수 없었다”며 슬그머니 태도를 180도 바꾸었다.

블룸버그통신의 칼럼니스트인 윌리엄 페섹은 한 칼럼에서 “한 개인에게 나라의 경제 운영이 좌우되는 경우는 드물지만, 한국의 경우는 사실상 그런 셈”이라며 “진 부총리가 출마하면 해외 투자자들은 김대중 대통령의 개혁에 대해 우려하게 될 것”이라고 썼다.

골드만삭스의 카롤로스 코데이로 부회장은 “한국 경제 회생에 있어 중요한 시기에 정부를 떠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내용의 친서를 보냈다.

진 전 부총리 개인으로서는 그야말로 ‘영광’이다. 주요 경제관련 인사들이 인정해 주니 그보다 더 명예스러운 일이 있을까.

하지만 왜 그들이 그런 칼럼을 쓰고 친서를 보냈을까. 진 전 부총리를 개인적으로 좋아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냉혹한 국제 자본의 논리, 외국 투자자들의 생리를 대변한 것이 아닐까. ‘오럴 해저드’가 초래할 결과가 너무 뻔히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로서는 부총리 개인의 신상에 관한 문제지만, 외국 투자자들이나 국제 금융시장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오럴 해저드는 무엇보다 우선 신뢰도에 큰 영향을 미친다. ‘경제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는 지난 개각에서의 그의 유임 사유와 이번 사임의 변이 겹치면서 ‘한국은 역시 그런 나라구나’하는 인상을 국제 사회에 더욱 각인 시키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

차라리 외국 투자자들에게 “한국의 정치상황은 특이한 점이 있다. 나는 정치를 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라고 말했으면 좀 더 낫지 않았을까.

앨런 브라인더 전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부의장은 이런 조사 결과를 내놓은 적이 있다.

정책의 신뢰성을 유지하는 데는 정책 당국자의 오럴 해저드 해소가 가장 먼저다.

정책에 대한 신뢰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말과 행동이 항상 일치하는 전통에 의해 정책 당국자의 오럴 해저드를 해소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신중하게 발언하고 일관되게 행동하는 정책 당국자는 제도나 정권 교체 등에 관계없이 진정한 신뢰를 받을 수 있다는 것 등이다.

이제 최소한 선거 때까지 만이라도 더 이상의 오럴 해저드는 없어야 한다. 그래야 경제가 살아 날 수 있다.

이상호 논설위원

sh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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