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의 일이다. 둘째의 공부를 봐주러 오는 대학생 언니의 구두를 바로 놓아주다 우연히 상표를 보게 되었다.그 유명한 이탈리아제 구두 페레가모였다. 순간 내 머리 속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도저히 처리할 수 없는 정보를 받아들인 8비트짜리 구식 컴퓨터처럼….
우선 떠오른 반응은 ‘그게 얼마짜리인데…’였다. 페레가모는 내가 그녀에게 한 달에 지불하는 수업료를 훨씬 뛰어넘는 고가의 명품이다.
‘이걸 사 신으려고 넌 이렇게 한 달을 고생하는 거니?’라고 묻고 싶었다.
다음엔 먼 인척벌인 그녀의 부모얼굴이 떠올랐다. 넉넉치 않은 살림에 아둥바둥 종종걸음을 치는 형편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돈을 꽤 잘 버는 주변의 커리어우먼들과 친구들 생각도 났다.
직업적인 이유(외국인 상대의 PR회사 운영이라든가, 패션전문지 편집장) 때문에 간혹 명품을 걸치는 경우는 봤어도 구두 한 켤레에 30∼40만원 이상을 지불하는 사람은 적어도 내 주변엔 없다.
파리나 밀라노 거리의 멋쟁이 여성들이 걸친 평범한 백과 구두, 중산층들이 모여 사는 미국 교외 주택가 아줌마들의 청바지, 티셔츠차림 등 직접 접해 본 장면들도 떠올랐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조금 가라앉자 이번에는 그녀의 반론이 들려왔다.
“…수입의 몇%이상은 멋내기에 쓰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저희에겐 없어요. 6·25세대를 부모로 둔 당신의 소비 기준으로 우리를 재단하지 마세요. 아무리 비싸도 명품이 주는 기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답니다. 요즘은 소비의 민주화 시대입니다. 얼마 이상 버는 계층만 명품을 즐길 수 있다는 사고방식 역시 시대에 뒤떨어진 것 아닌가요….”
다시 내 머리 속 컴퓨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하긴 시대에 따라 소비의 기준도 변할 수 밖에 없다. 한 달에 100만원 남짓 벌어 그걸로 100만원이 넘는 명품 백을 산다고 한들 남에게 피해 끼치지 않는 다음에야 무엇이 문제랴. 세계 초일류 명품 회사들의 세련된 글로벌 마케팅에 우리의 순진한 아가씨들이 무엇으로 대항할 수 있으랴….”
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의 아쉬움은 계속 앙금으로 남았다.
맨 얼굴에 청바지를 걸쳐도 예쁘기만 할 나이에 왜 명품의 거품에 휘둘리는 건지, 노골적인 명품 브랜드가 주는 몰개성의 함정을 왜 모르는 것인지, 누구나 가졌기에 나만은 거부해 보는 용기는 없는 것인지.
150년 전 독일의 사회통계학자 엥겔은 가계의 소비지출에서 음식비가 차지하는 비중을 가지고 그 가정의 생활수준을 재는 척도로 삼았었다.
21세기 한국의 20대 여성들이 보여주는 명품 소비성향은 어떤 계수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이름 모를 경제학자에게 묻고 싶다.
이덕규·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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