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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후의 여성탐구] 한명숙 여성부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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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후의 여성탐구] 한명숙 여성부장관

입력
2002.04.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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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만 쳐다보고 살 수 없다”는 남편과 25세에 결혼한다. 결혼 6개월 만에 남편은 투옥된다. “한명숙은 바보다. ” 13년을 기다린 아내를 박 성준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영어를 잘하고 목소리가 예뻐 춘향 역을 맡았던, 순수하고 나서기 싫어하던 문학소녀는 그 자신도 35세(1979~1981년)에 투옥되고 57세에 장관이 된다.

의사이며 사회활동이 많았던 외할아버지는 아내 사랑이 각별했다. 어머니의 이름은 ‘이씨와 김씨의 사랑’이라는 의미를 담은 ‘이금애’다. 부모 성을 함께 넣은 최초의 인물이다. 외할아버지가 그렇게 하셨다.

그런 진보적인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사회는 의사가 되고 싶어했던 어머니의 바람을 허용하지 않았다. 대신 간호부로 일하며 평생 아버지 뒷바라지를 했다.

아버지는 공부 잘하고 음악과 운동에도 능통하신 분. 친구들과 술을 드시면 오페라를 부르던 분이었다. 그러나 가정보다 밖을 더 좋아하는 한국 남자였다. 남녀 차별은 없었다. 육남매 중 맏이인 한 장관은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를 잘해 아버지의 기대를 얻는다.

아버지 손을 꼭 잡고 농구경기를 보러 가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경기여중 진학 실패 후 아버지는 노골적으로 실망감을 표현, 그 열등감은 지워지지 않는다. 가장 큰 아픔. 아버지와의 관계는 소원해진다.

아버지는 딸이 17세가 되던 해 사업에 실패한 후 중풍으로 쓰러지신다. 그 후 어머니가 모든 살림을 책임지신다. 통 크고 대범하고 낙관적인 어머니. 흔들림이 없으셨다. 외형적으로는 순종하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의 주관이 뚜렷하신 분.

당신이 못한 사회활동을 하기 위해 딸이 의사가 되기 바랐다. 요구하진 않는다. 딸은 그 기대에 맞춘 선택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아무 말이 없으셨던 분. 딸과 어머니는 평생 동지다. 그 어른이 94년 타계하신다. 그 날 ‘별이 떨어진 것처럼 멍한 상태’를 경험한다.

서른 살 전의 한 장관의 모습은 지금과 달랐다. 어머니 기대와는 달리 한 남자를 사랑하는 평범한 보통 여성이었다. 그렇게 살아야 했던 이유가 있다. 아버지다. 중풍으로 쓰러진 아버지에게는 여러 의미가 있다. 딸의 실패에 대한 아버지의 노골적인 실망감의 표현은 부끄러움과 열등감을 자극한다.

동시에 아버지로 인한 아픔과 그에 대한 죄의식이 무의식 깊숙이 자리잡는다. 그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고 중풍으로 쓰러진다. 아버지는 한 장관의 무의식 속에서 다시 일어나야 한다. 그 영향은 여러 면에서 보인다.

훨씬 영향력이 많던 어머니보다 감성적인 아버지처럼 문학소녀가 되고자 한다. 딸이 의사가 되기 원했던 어머니를 충족시켜 드리는 것은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연기된다.

대학 때 기독교에 심취하는 것도 같은 이유일 수 있다. 하나님은 크고 강한 아버지다. 기독교 신앙은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또 다른 남성. 그가 남편이다. 존경의 대상이자, 리더였던 남편. “너만 쳐다볼 수 없기에 결혼하기 어렵다”는 가정보다 사회 중심적 사고를 하는 것은 아버지와 유사하지만 진지하고 성실한 면에서는 보완된 아버지상이다. 하지만 투옥 생활 중 아내보다 더 섬세한 편지를 썼던 남자. 그 남편을 13년 동안 기다린다.

이제는 어머니다. 크리스챤 아카데미 시절 여성에 대한 자각을 본질적으로 깨우친다. 아버지와에게 가졌던 무의식적 부채의식이 해소되고 더 돈독한 관계인 어머니를 바라보게 된다.

어머니 같은 측면이 부상된다. 어머니의 숙원인 ‘여성의 사회실현’이 시작된다. ‘남성을 향했던 여성적인 삶’은 ‘여성을 위한 남성적인 활동’으로 변한다. 아버지와의 수동적인 삶은 어머니와의 적극적 삶으로 대치된다.

여성 운동가는 어머니가 말로 설명할 순 없지만 바라셨던 바로 그 삶이다. 실제 원하셨던 것은 의사가 아니다. 여성의 사회적 활동을 위한 삶이 바로 어머니의 희망이었다. 딸은 늦었지만 어머니의 기대를 어머니보다 더 정확하게 맞춰 드린다.

이후 어머니와 딸은 서로 긍정적 작용을 하며 상승하기 시작한다. 어머니는 딸의 활동상황에 대한 신문 스크랩을 전부 모아두신다. 여성 운동을 하면서부터 외형적으로 보기엔 다른 사람이 된다. 활동성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다.

부드럽지만 원칙에 입각한 소신은 어떤 난관도 극복한다. 나서기를 싫어하는 성격의 한 장관이 국회의원이 되고 장관을 맡는 것은 신기하다. 무의식적으로 자신은 아니다.

어머니의 삶 속 응어리진 우리나라 여성의 한을 풀어야 하는 의무 때문이다. 자신 속에 있는 어머니를 대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고된 시련에도 웃음을 잃지 않고, 부드럽고 원만한 인간관계를 한다는 점은 대단한 능력이다. 여성 운동가들에게 보이는 억울함에 의한 분노와 격정적이고 공격적인 태도는 볼 수 없다. 정서적인 성숙은 상대를 편안하게 만든다.

타고난 배려는 후배와 동료들의 적극적 지지를 이끌어 낸다. 여성들뿐 아니라 남성들과의 관계도 안정적이다.

아버지와의 화해는 보통 남자뿐 아니라 남성 우월 주의자까지 포용할 능력을 부여한다. 여성운동가이면서 장관과 정치를 할 수 있는 당연한 이유이다. 개인적 욕심은 없다. 지금도 운동복 차림에 쓰레기를 직접 버린다.

▲1944년 평양 출생

▲1967년 이화여대 불문과 졸업

▲1974~1989년 한국 크리스챤아카데미 간사

▲한국여성민우회 회장(89~94), 한국 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93~96) 역임

▲2000~2001 제16대 국회의원

▲여성부 장관

■지인들이 본 한명숙 장관

한명숙 장관의 지인들은 “보기에는 유순해 보이지만 대단한 사람”이라고 평한다. 70년대 후반부터 그를 알고 지낸 여성운동가 이우정(‘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이사장)씨는 고난의 세월을 함께 하며 한 장관의 굳건한 심지를 엿보게 되었다.

“당시 한 장관이 크리스챤아카데미에서 여성노동자 교육을 맡고 있었어요. 그때만 해도 빈민운동가도 다 좌경으로 잡혀가 고문을 당했습니다. 면회를 갔었는데, 무릎 꿇은 자세에서 사정없이 구타를 당해 참혹한 모습이었습니다. 나중에 걷지도 못하더군요. 그 고초를 겪으면서도 조금도 물러서지 않은 사람입니다.”

자신보다 먼저 구속된 남편을 13년간 기다리면서 그는 줄기차게 인권과 민주화 운동을 했다. 이 이사장은 “수사기관에서 24시간 사생활을 감시당하는 등 적잖게 마음고생을 했지만 부부 사이에는 변함없이 굳은 신뢰와 애정이 있었다”고 전한다.

적을 만들지 않고, 어디에서건 ‘욕’을 듣지 않는다. 당시 크리스챤아카데미의 운동 방식에 대해 일각에서는 ‘너무 온건하다. 개량주의다’라는 비난이 있었지만 한 장관에 대해서만은 그 뚜렷한 처신과 원만한 인간관계 때문에 누구도 시비를 걸지 않았다.

역시 30년 가까이 그를 곁에서 지켜 보았던 후배 장필화 이화여대 교수(여성학)는 “화를 내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될 수 있는 대로 상대방을 이해하며 포용하려 합니다. 나이 어린 후배에게도 전혀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쾌활하고 넉넉하지요. 상냥하거나 자상한, 전통적인 여성성과는 조금 다르죠. 이북 여성답다고 할까요. 대범하고 조금 무뚝뚝하면서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만큼 신뢰를 줍니다.” 단순히 ‘사람좋다’는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장 교수는 “흐트러진 모습을 한 번도 보인 적이 없습니다.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조금도 내색하지 않는 강인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한다.

양은경기자

ke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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