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의 만년약체에서 월드컵 16강의 반란을 꿈꾼다.세계축구의 변방에 머물렀던 에콰도르가 건국이래 첫 월드컵 본선무대를 밟고 내친김에 16강 진출까지 넘보고 있다. 그동안 21번 맞붙어 단 한번도 이기지 못한 브라질을 꺾는 등 지역예선에서 아르헨티나에 이어 2위(9승4무2패)를 기록, 본선티켓을 여유있게 확보하며 남미축구의 들러리 탈피를 선언했다.
이탈리아 크로아티아 멕시코와 함께 묶인 G조에서 초년병 에콰도르의 본선 2회전 진입 전망이 밝지 만은 않지만 강호들과 맞서 일궈낸 남미예선 2위에 걸맞은 성적을 낼 것으로 기대하는 의견도 만만찮다.
현재 국제축구연맹(FIFA)랭킹은 37위. 이탈리아에 이어 조 2위로 16강에 오르는 게 목표인데 스타일을 잘 아는 멕시코와 달리 1998 프랑스월드컵 3위의 크로아티아가 경계 대상이다.
에르난 다리오 고메스(45)감독의 카리스마 아래 펼쳐지는 투톱 아구스틴 델가도(잉글랜드 사우스햄턴)와 이반 카비에데스(스페인 바야돌리드)의 공격력이 제때 터져 준다면 돌풍을 본선무대까지 이어갈 수 있다고 자신한다.
▼원투펀치 델가도와 카비에데스
16강 염원을 수행할 주인공은 남미선수로서 보기 드문 187㎝의 장신 스트라이커 델가도(28). 지역예선을 통과한 것은 그의 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선 18경기 중 16경기에 출전, 9골을 터뜨리며 아르헨티아의 크레포스와 함께 최다 득점을 기록했다.
그는 예선 첫 경기인 베네수엘라전부터 선제 결승골을 뽑아냈고 브라질과의 원정경기에서는 승부처에서 본능적인 집중력을 발휘, 결승골을 끌어내 1-0 승리를 견인했다.
델가도는 멕시코 네카사 클럽시절 출전한 FIFA 세계클럽선수권대회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쌓기 시작했고 특히 스페인 명문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보는 이의 탄성을 자아내는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지난해 11월 이적료 500만달러(약 65억원)에 잉글랜드 사우스햄턴으로 둥지를 옮긴 그는 ‘델가도열풍’ 에 들떠있는 고국팬들에게 16강 희망의 근원이 되고 있다.
또 다른 공격의 축 카비에데스는 이탈리아 페루자를 거쳐 스페인 프로리그에서 알아주는 골잡이로 통한다. 델가도와 함께 ‘쌍권총’으로 불리며 좁은 공간을 활용하는 개인기와 순간적인 위치 선정이 탁월하다. 지역예선서 3골을 잡았고 본선직행 티켓이 걸린 우루과이전 후반 천금 같은 헤딩 동점골을 넣었다.
▼4-4-2 시스템과 거친 수비
이들 쌍권총의 활약은 주장이자 플레이메이커 알렉스 아기나가(멕시코 네카사)의 노련한 중원지휘에서 비롯된다. 4-4-2 시스템이 안정적으로 정착돼 강력한 수비를 펼치다 기회가 생기면 투톱을 앞세운 역습이 날카롭다. 포백라인에서는 울리세스 델라크루스(브라질 크루세이루)와 이반 우르타도(멕시코 UNL)가 예선을 통해 철통수비를 선보였다.
에콰도르는 그러나 이탈리아는 물론 크로아티아와 멕시코로부터 손쉬운 1승 제물로 여기지고 있다. 투톱이 막히면 마땅한 공격루트가 없다는 약점 탓도 있다. 1월 북중미 골드컵에선 아이티의 수비에 투톱이 꽁꽁 묶여 예선탈락하는 낯 뜨거운 결과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고원에서 다져진 강인한 체력과 호전적인 정신력을 무기로 멕시코의 발목을 잡고 크로아티나를 넘어 16강에 간다는 투지로 불타고 있다.
박석원기자
spark@hk.co.kr
■'고지대 이점' 홈서만 무적?
에콰도르 본선진출의 일등공신은 안데스산맥? 지역예선 탈락이 예상됐던 에콰도르가 꿈의 월드컵 본선무대를 밟게 되자 한동안 ‘고지대 수혜론’이 나돌았다. 남미의 북서단 안데스산맥 고지대에 위치한 국립경기장의 홈어드밴티지 덕분이라는 것이다.
에콰도르의 16강 진입에 비관적인 전문가들은 이를 근거로 볼리비아 얘기를 꺼낸다. 1994년 미국 월드컵 당시 고원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해 본선에 오른 볼리비아가 1회전 탈락으로 한계를 드러낸 사실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에콰도르는 예선 18경기중 9경기를 해발 2,850m에 자리잡은 수도 키도의 국립경기장에서 4만8,000여 홈관중의 응원속에 치렀다. 성적은 6승2무1패. 고지대에 적응이 잘 된 홈팀은 브라질을 상대로 전반을 대등하게 보낸 뒤 후반 시작 4분만에 결승골을 넣어 1-0으로 승리했다.
등산을 해본 사람이라면 이 정도의 높이에서는 조금만 힘을 쓰거나 운동을 하면 숨이 가빠지고 기력이 약해지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다. 참고로 백두산이 2,750㎙, 남한 최고봉인 한라산이 1,950㎙다.
남미지역 예선에서 에콰도르가 브라질을 꺾었다면 볼리비아는 아르헨티나를 눌러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결국 본선행에 실패했지만 볼리비아는 줄곧 하위권에 처져 있으면서도 1위 아르헨티나를 안방에서 혼냈다.
전문가들은 지난해 4월27일 열린 볼리비아와 아르헨티나전의 무승부 원인도 해발 3,600m의 고지대에 자리잡은 경기장에서 찾는다. 아르헨티나는 시종 끌려다니다가 패배 직전에 극적으로 동점골을 터뜨렸다.
이준택기자
■고메스 감독…총알도 못꺾은 '대쪽' 사령탑
16강진출의 국민적 염원을 한몸에 짊어진 에르난 다리오 고메스(45) 감독은 호쾌한 성격에 두둑한 뱃심의 사나이다. 콜롬비아 출신인 그의 처지는 거스 히딩크 한국감독과 비슷하지만 정열적인 에콰도르 국민과 맞닥뜨려야 하는 고메스의 입장은 우리보다 훨씬 더 미묘하다.
하지만 고메스에 대한 에콰도르 선수와 국민의 신뢰는 거의 절대적이다. 그의 강력한 지도아래 에콰도르는 최초의 본선진출과 더불어 FIFA 랭킹이 53위에서 37위로 껑충 뛰어올랐다.
그에 대한 반대파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의 강력한 카리스마는 총격사건까지 불렀다. 고메스는 지난해 5월 청소년대표팀 선발과정에서 망명중인 전 대통령의 아들이 최종엔트리에 포함된다면 감독직을 그만두겠다고 고집을 세우다 그의 경호원으로부터 총격을 받았다.
허벅지 총탄제거 수술을 받은 고메스가 콜롬비아로 돌아가 감독직을 사임하겠다고 알려오자 대표팀 주장 아기나가는 자기도 그만두겠다고 밝혔고 선수들이 소집에 불응하는 등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언론과 국민의 호소에 고메스는 결국 사임의사를 철회하고 에콰도르에 돌아왔다.
그의 불 같은 성미는 투혼예찬론에서도 잘 드러난다. 고메스는 “개인기의 상대적 열세를 안고 강팀과 맞서려면 월등한 체력과 거친 플레이가 최선의 비책”이라고 지론을 피력한다. 고메스는 같은 남미의 브라질(개인기 중심)이나 아르헨티나(개인기와 파워의 결합)와 전혀 다른 터프한 플레이를 추구한다.
예선 18경기에서 나온 옐로카드가 무려 47개에 퇴장이 2개에 달했다. 게임당 경고수가 3개에 이를 만큼 거친 축구를 했다는 반증이다. G조의 이탈리아 크로아티아 멕시코는 에콰도르와의 경기에서 선수보호의 부담을 갖게 된 것이다.
박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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