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시대에 현인(賢人)이라 불리던 사람들은 단순히 어질고 현명하다는 국어사전적 의미의 사람들만은 아니었다.현인이라는 이름은 주로 권력을 선선히 사양하였다는 사실, 이른바 예양(禮讓)을 통해 얻어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남방의 대국 오나라에는 계찰(季札)이라는 현인이 있었다.
그가 현인의 칭호를 얻은 것도 역시 오나라 군주의 자리를 기꺼이 사양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아버지인 수몽(壽夢)의 뒤를 이어 군주로 추대 되었지만 그 기회를 자신의 형들에게 번번이 양보하고 말았다.
그 후 그는 종종 군주의 특사 자격으로 여러 나라를 예방했는데 그가 어느 나라를 방문한다고 하면 그 나라의 군주나 대부들은 그를 맞아 예에 어긋나는 점이 있을까 전전긍긍하였다고 한다.
그만큼 그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권력욕에 찌든 제후나 대부들을 부끄럽게 만들곤 했던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백이와 숙제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은 무왕의 은(殷) 정벌을 반대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주나라에서 “나는 곡식을 먹지 않겠다”며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만 캐어 먹다가 죽은 괴팍한 노인들이다.
그들도 원래는 발해만에 인접한 조그마한 나라의 왕자들이었다.
아버지가 둘째 아들인 숙제에게 나라를 물려주자 숙제는 형을 두고 자신이 나설 수 없다며 사양하였고, 형인 백이도 아버지의 명을 어길 수 없다고 함께 사양하다가 결국 둘 다 나라를 떠나고 말았다.
그들이 보여준 예양의 정신은 훗날 학인들의 윤리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대표적 소재가 되었던 것 같다.
태백(泰伯)도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주대(周代) 천년의 기틀을 잡은 문왕(文王)의 큰아버지였다.
어렸을 적부터 조카의 비범함을 알아본 그는 어린 조카가 대업을 일으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일부러 아우에게 주나라를 양보하고 남방 오랑캐족 가운데로 달아나 버렸다.
공자는 그를 일컬어 지덕(至德)이라 하였는데 지덕은 너무 커서 사람들이 그 은택을 알아채지 못하는 덕이라 한다.
나는 가장 지혜로운 철인(哲人)이 정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플라톤의 이상을 별로 신봉하지 않는다.
잘은 모르지만 세상의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는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춘추시대처럼 현인의 이상이 그 나름대로의 역할은 하는 세상이 되었으면 한다.
춘추시대에도 위정자들은 권력을 두고 피 터지는 싸움을 했고 나라와 나라 사이에도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다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현인의 이상이 현실적으로 수용되었다는 것이 오늘날과는 다른 점이었다.
바야흐로 이 땅에 권력 쟁패의 계절이 다시 돌아왔다.
그 누추한 각축 속에서 이런 옛 이야기가 귀담아 들릴 리 없겠지만 이 계절만 되면 나는 허전한 마음으로 저 장대하던 예양의 모습을 그려보게 된다.
예양은 꼭 옛 것만은 아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요구되는 미덕이다.
돌이켜 보면 15년 전에도 우리는 그런 예양의 큰 모습을 볼 기회가 있었지만 결국 보지 못하고 말지 않았던가.
만약 그 때 우리가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었더라면 지금쯤 우리 한국인들의 눈은 훨씬 맑게 빛나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그 꿈을 간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이상을 한 몸에 구현한 현인은 없을는지 몰라도 나는 그 예양의 정신이 사람들의 마음 속 어딘가에는 남아 있다고 믿는다.
도무지 가망이 없어 보이는 일도 생각하면 결국 마음 하나에 달려 있는 것이다.
침침해지려는 눈을 뜨고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는 우리도 그런 마음의 장대한 발현을 볼 날이 있을 것이다.
이수태·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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