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종일 봄비가 내리던 16일, 서울 남산 한옥마을의 순정효황후 윤비(순종의 비) 친가 대청마루에서 귀한 소리판이 벌어졌다.‘우리 시대 최고의 소리판-국창’이란 이름 아래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명창 중의 명창 8명이 판소리 다섯 바탕 중 골라서 20분씩 토막소리를 하고, 특별히 초대된 귀명창(판소리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관객) 50명이 들었다.
출연자는 93세 고령의 정광수 옹을 비롯해 한승호 박송희 오정숙 성우향 송순섭 조상현 안숙선. 북 장단은 김성권 주봉신 정화영 김청만이 번갈아 맡았다.
설명이 필요없는 명창 명고수에 귀명창까지 모여 판을 벌였으니 음식으로 치면 진수성찬 중에도 으뜸이다.
장짓문을 모두 걷어올려 앞뒤로 확 터진 대청마루에 앉으니 바깥 풍경이 고스란히 들어왔다.
낮은 담장 너머로 고개를 내민 붉은 꽃은 비에 젖어 흔들리고 빗물은 기와지붕 처마를 타고 쪼륵쪼륵 흘러내리고.
이날 따라 날씨가 궂어 세찬 바람이 불면서 기온이 떨어져 허연 입김이 나고 오들오들 떨렸다.
그러나 서양식 극장을 본따 지어진 요즘 국악 공연장의 갑갑하고 딱딱한 실내에 비하면 시원하고 자연스런 맛이 특별했다.
소리판은 본래 너른 마당이나 대청마루에서 하던 것이지, 요즘처럼 무대와 객석이 딱 갈라지는 게 아니었다.
“요 자리가 달러요. ‘좋다!’고 안 혀요. 추임새를 넣지. 다른 자리서는 (청중이) 먹먹하게 앉아있제.”
한승호 명창은 이날 소리판이 예사롭지 않음을 이렇게 말했다. 무엇보다 추임새가 살았다.
“얼씨구, 좋지, 으이” 하고 관객이 던지는 추임새는 소리판에 빠질 수 없는 감초이지만, 요즘은 귀명창이 드물어진 탓에 보기 힘들어졌다.
추임새는 아무 때나 터져도 곤란한 것인데, 이날은 제때제때 나오니 소리꾼도 신이 나 발림(판소리 하면서 하는 몸짓)이 절로, 청중은 우줄우줄 흥에 겨워 어깨가 들썩, 엉덩이도 들썩 한다.
소리꾼과 고수, 청중이 삼위일체를 이루는 소리판 본래의 모습이 되살아났다. 소리판의 참맛이다.
귀명창 앞에서는 소리꾼도 힘이 나는 걸까.
전날 공연의 피로가 덜 풀려 목이 안좋다고 호소하던 조상현 명창은 “지는 목구녘이 이러니 쬐끔만 할라요”라고 운을 뗐다.
그러나 정작 소리에 들어가서는 특유의 힘차고 시원한 성음으로 좌중을 휘어잡았다.
“얼씨구야, 잘 한다” 하는 추임새가 파도치듯 일어났다.
심청가 마지막 장면을 마치고도 계속되는 환성에 “이 사람 목도 아프고 고수 양반 팔도 아플 것이니 그만 더질더질”하고 끝막음을 했다.
대단하기는 다른 소리꾼도 마찬가지. 한승호 명창의 적벽가는 어찌나 우렁우렁한지 지붕이 들먹, 성우향 명창의 심청가 중 모녀 상봉 대목은 가슴이 뭉클, 정광수 옹의 수궁가는 고령에도 변함없는 점잖은 멋이 넌출댔다.
오정숙 명창이 춘향가 끝 대목에서 소리와 몸짓, 표정으로 보여준 익살과 흥은 좌중의 파안대소로 이어졌다.
송순섭 박송희 안숙선 명창이 각각 들려준 적벽가, 흥보가, 춘향가 또한 일품이었다. 이만한 소리판이 또 있을까.
5년째 판소리를 배우고 있다는 김성섭(64)씨는 “국보급 명창들이 한 자리에 모여 판소리의 정수를 들려줬다” 면서 “이 좋은 소리가 외래 문화에 밀리는 게 안타깝다”고 했다.
이날 공연은 판소리를 유네스코에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 신청하는 데 필요한 영상자료를 만들기 위해 마련된 것. 문화재청은 6월에 신청을 할 예정이다.
결과는 내년 3월 유네스코 본부가 발표한다. 현재 우리 것으로는 종묘제례와 제례악이 지정돼있다.
이날 공연은 KBS1 TV ‘국악한마당’이 28일 오후 1시 10분부터 70분짜리 특집으로 방송한다.
오미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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