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미식 축구 신인왕, 미식 축구 명예의 전당 헌액, 로즈 장학생으로 옥스포드대학 유학, 예일대 로스쿨 차석 졸업, 미 역사상 최연소 대법관, 전후 네번째 최장수 대법관 역임.저명 인사 서너 명의 이력서를 나열한 것이 아니다. 15일 84세로 타계한 전 대법관 바이런 화이트의 일대기다. 미국 언론들은 한 시대를 풍미한 그의 죽음을 ‘아메리칸 드림’과 ‘민주주의의 대의(大義)에 충실한 법관의 표상’으로 상찬하며 애도하고 있다.
1917년 콜로라도주 포트 콜린스에서 가난한 사탕수수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화이트는 공부와 운동에서 모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해 콜로라도대학까지 줄곧 장학생으로 학업을 마쳤다. 미식축구, 농구, 야구 등에 탁월한 만능 스포츠맨이었으면서도 줄곧 수석을 놓치지 않았던 그는 졸업과 동시에 빌 클린턴 대통령이 수학해 유명한 로즈장학생에 선발됐다.
그러나 돈이 궁한 나머지 미식 축구 선수로 피츠버그팀에 입단했고 그해 최고 연봉선수와 함께 신인상을 받았다. 부와 명성을 동시에 달성한 화이트는 그 다음해 돌연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로즈장학생 신분으로 옥스포드대로 유학, 공대신 책을 잡았다.
행운이랄까, 영국 유학 시절 그는 훗날 인생의 최대 후원자인 존 F 케네디를 만나 관포지교를 맺었다. 때마침 발생한 제2차대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한 화이트는 예일대 로스쿨에 진학했다.
그러나 운동에의 미련을 떨치지 못한 그는 예일대를 휴학하고 미식 축구에 복귀, 1940년 미식 축구 하프백으로서는 기록이라할 514야드 대쉬 기록을 세우는 등 대활약을 펼쳐 1954년 미식 축구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2차대전 참전 후 예일대에 복학, 차석으로 졸업한 그는 케네디 후보 참모로 활약한 뒤 일약 법무부 부장관에 발탁됐고 이어 최연소 대법관이 됐다.
대법관 재직 중 그는 소수민족 권리향상 등에 앞장서 인권변호사로서 성가를 얻었으나 몇 가지 결정적인 판결에서 보수파에 섬으로써 논란을 일으켰다. 종신제라서 임기가 평생 보장돼 있는데도 그는 1993년 홀연히 “후진에게 기회를 주겠다”며 법복을 벗어 또 한차례 화제를 모았다.
뉴욕타임스는 16일 이례적으로 사설을 통해 “미국의 가치관이 변했을 뿐 그는 시종일관 소신을 지켰다”고 평가하고 “무엇보다도 정치권에의 유혹을 떨쳐버린 용기가 돋보인다”고 추모했다.
워싱턴=윤승용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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