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이나 축구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떠오르는 선수가 있다. 1970년대초 대표팀 공격수로 활약했던 박이천 선수.그의 실력이 뛰어났던 이유도 있지만, 나를 ‘박이천’이라 부른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 4학년 담임 선생님 때문이다.
4학년 초 어느날, 선생님은 나를 빤히 보더니 “너, 박이천 선수랑 많이 닮았다”며 그 순간부터 ‘박이천’이라 불렀다.
내 얼굴을 알고 박이천 선수의 얼굴을 안다면 몇 가지 공통점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까만 피부, 펑퍼짐한 얼굴, 납작한 코… 그러나 선생님이 그렇게 불러줄 때마다 나는 존재를 인정받고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발표를 시킬 때도 “박이천” 하며 불러냈고 칠판에 지도를 그려놓고도 나를 일으켜 세워 “박이천, 이 강 이름이 뭐냐”고 물어보았다.
처음에는 쑥스럽고 대답도 잘 못했는데 나중에는 대답도, 발표도 잘했다. 선생님은 그림대회, 글짓기대회, 고전읽기대회에도 나를 내보냈다.
상은 못 탔지만 즐거운 하루하루였다. 칭찬이 좋아 공부를 했고 책도 읽었다.
호랑이 선생님으로 소문 나 다른 아이들은 모두 무서워 떨었으니 파격적인 대접을 받은 셈이다.
얼굴 하얗고 아버지 직업 번듯하고 엄마가 학교 자주 드나드는 아이라야 칭찬받는 것으로 생각했던 나로서는 뜻밖의 일이었다.
나를 왜 그렇게 대했을까. 지금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물론 짚이는 게 없지는 않다.
까맣고 꾀죄죄한 얼굴, 볼품없는 옷차림에 가끔 전라도 사투리까지.
외모로 봐서는 꼴찌 언저리가 맞는데, 그보다는 조금 나았으니 그것만으로도 기특해 보였던 건 아닐까.
사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여수에서 부산으로 전학한 뒤 좌절을 맛보았었다. 말투가 달라 잘 알아듣지 못했다.
가위표라 했던 X 표를 부산에서는 ‘곱표’라 불렀는데 곱표를 공표(O)로 잘못 알아들었다.
“돼지 저금통… 이웃돕기 성금… ” 이런 얘기에 저금통 하나 갖고 가 웃음거리가 된 적도 있다.
선생님은 “성금 가져와서 저금통에 모아 이웃에게 전달하자”고 했고 다른 아이들은 성금을 가져왔는데 나만 저금통을 가져간 것이다.
그때는 시험을 봐도 20~30점, 잘 해야 40점이었다. 아이들은 몸집도 크고 힘도 셌다.
2, 3학년이 되면서 나아지기는 했지만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그러니 4학년 선생님은 정말 뜻밖이었다.
그렇게 1년을 보낸 뒤 나는 많이 변해 있었다. 성적도 올랐고 말도 많아졌으며 아이들과의 관계에서도 자신이 생겼다.
그 후로, 선생님 칭찬 없었더라면 자식들 먹고 싶은 것 먹이고, 하고 싶은 것 시킬 수 있었을까 생각한 적 한두 번이 아니다.
어린 시절 받은 칭찬이 한 사람의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 지 두고두고 생각한다.
작년에 간신히 연락처를 알아 전화한 적이 있는데 선생님은 나를 기억하지 못했다.
“나 혼자만 그렇게 생각해왔나” 서운한 마음도 들었지만 내 인생의 전기를 마련해준 선생님의 고마움은 잊을 수 없다.
스승의 날도, 월드컵도 얼마 남지 않았다. 선생님을 한번 만나 뵙고 싶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