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흑백영화 '낙타(들)' 박기용 감독“지난 2월 베를린 영화제에서 한 관객이 ‘당신 영화는 여전히 관객을 괴롭힌다’고 나에게 말했다. 그래서 ‘이야기를 좇기보다 주인공들과 함께 그곳에 있다고 생각해 달라. 그러면 좀 더 재미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관계, 특히 남녀관계를 통해 사람과 세상을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1997년 ‘모텔 선인장’으로 데뷔한 박기용(41) 감독.
정우성 이미연 박신양 등 스타들이 출연했고, 제목도 선정적( ‘모텔 성인장’ 등 에로 영화로도 제목이 차용됐다)이었지만 그 안에는 삭막하고 맞닿지 못하는 관계만이 있었다.
작가주의적 색채가 짙어 흥행에는 실패했다.
4년 만인 지난해 그는 아예 작가주의 영화에 정공법으로 다가선 저예산 디지털흑백영화 ‘낙타(들)’을 선보였다.
부산, 로테르담, 베를린 영화제 참가에 이어 스위스 프리부르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5월 벨기에 겐트, 6월 시애틀과 멜버른 영화제 등 그의 영화는 ‘세계 일주’를 앞두고 있다.
그리고 26일 개막하는 전주국제영화제에서도 가장 주목을 받고 있다.
‘낙타(들)’은 두통 때문에 약국에 들르던 40대 초반의 남자(이대연)와 30대 후반의 약사(박명신)의 1박2일 여정을 시간 순으로 담았다.
남자와 여자는 러브호텔이 많은 유흥가로 변한 서해안 월곶으로 향한다.
회를 먹고, 노래방에 가서 키스를 하고, 방에 들어간 두 사람은 정사를 마치고 비빔국수를 시켜먹고, 잠을 잔다.
둘 사이에 벌어진 유일한 사건이라고는 남자가 빌려온 차에 약간의 흠집이 난 것이다. 불륜은 뜨겁지도, 흥분되지도 않는다.
심지어 10여분에 이르는 섹스 신도 말초신경을 자극하지 않는 차가운 불륜 영화다.
“일생에 한번 올까말까 한 그런 순간에도 우리 인생은 화려하지 않다. 그 보이지 않는 것들을 어떻게 표현할까, 이것이 나의 해법이다.”
유럽 영화평론가들의 반응은 뜨겁다.
차가운 시선으로 불륜을 응시하고 아무 것도 말하지 않고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많은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여기에 35㎜필름 영화로는 도저히 엄두 낼 수 없는 롱 테이크.
“일반 영화를 촬영할 때 쓰는 200자 필름으로는 롱테이크가 3분에 지나지 않고, 1,000자를 사용해도 10분 정도다. 그러나 이 영화는 무려 25분(영화에서는 10분으로 편집)의 롱 테이크가 가능했다.”
주무대였던 연극에서 영화계의 믿음직한 조연으로 자리매김한 이대연의 연기와 아마추어 박명신의 연기는 마치 몰래카메라를 들고 일반인을 찍은 듯 자연스럽다.
“배우들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박명신이 오래 기다리는 장면을 위해서는 무작정 그녀를 2시간 기다리게 했고, 상황만 설정해 주었다. 이대연도 “당신 영화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느냐. 재미있게 해보자”며 자신을 버렸다.”
카메라 1대로 12일간 촬영했고, 영화진흥위원회의 후반작업 지원금을 받았다. 총 제작비는 9,800만원.
“우리 삶은 어딘지 모르고 걸어가는 사막의 낙타와 같다. (들)이란 둘이 있으나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라는 박기용 감독. “5월이나 6월쯤 극장에 걸고 싶은데…”
박은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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