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空中(공중)이란 말/ 참 좋지요/ 중심이 비어서/ 새들이/ 꽉 찬/ 저곳// 그대와/ 그 안에서/ 방을 들이고/ 아이를 낳고/ 냄새를 피웠으면’(‘저곳’ 부분)시집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창작과비평사 발행)는 시인 박형준(36)씨에게 “이제 당신의 청년이 저물었다”고 알려준다.
199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뒤 그가 세번째로 펴낸 시집이다. 치열한 언어의 조련에 바탕한 그의 섬세한 서정이 한층 돋보이는 시집이다.
그는 그동안 스스로 많이 변했다고 했다. 등단 초기에는 간절하게 바라는 ‘저곳’만 보였다.
이제는 저곳으로 날아가기 위해서는 ‘이곳’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그의 새 시집은 비상(飛上)의 미세한 움직임으로 가득하다. 하늘로 다시 올라가는 눈발, 굴뚝을 타고 오르는 물결, 콩나물에서 무럭무럭 올라가는 김 등등.
시인은 한 가지 방법을 발견한다.
‘공중(空中)이라는/ 말// 뼛속이 비어서/ 하늘 끝까지/ 날아가는/ 새떼’(‘저곳’ 부분) 그는 비워야 날아오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비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둘러본다. 그것은 ‘신발’로 상징되는 육체의 무거운 부분이다.
‘멈칫멈칫 뒤를 보며 울고 있는/ 신발을 들고 선,/ 넌/ 길처럼 하늘로 오르는 풀’(‘하늘로 오르는 풀’ 부분)
“시를 쓰는 일에서 시대를 보고 혁명을 꿈꾸는 거장들도 있고, 단순히 그때 왜 나에게 그런 일이 생겼을까를 상상하며 시를 쓰는 사람도 있다. 나는 후자이다.”
그때 박씨에게 시를 쓰는 것은 미성년으로 남고 싶다는 열망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랬던 시인이 이제 몸을 일으켜 ‘저곳’으로 날아오르고 싶어한다.
이륙을 위해서는 자신이 자리잡은 ‘이곳’을 천천히 살펴보아야 한다.
‘해가 지는 속도보다 빨리/ 어둠이 깔리는 풀밭./ 벗은 맨발을 하늘에 띄우고 흔들리는 흰 풀꽃들./ 나는 가만히 어둠 속에서 날개를 퍼득여/ 오리처럼 한번 힘차게 날아보고 싶다// 뒤뚱거리며 쫓아가는 못난 오리’(‘사랑’ 부분)
박씨는 지금껏 혼자만의 기억에 의지해 시를 썼다고 했다. 이번 그의 시집에 실린 시편을 받치고 있는 것은 많은 부분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다.
한달에 한번 시골에서 올라와 밀린 빨래와 밥을 해주는 어머니, 올라올 때마다 “밥 잘 먹어라 건강이 솟애내고 힘이 잇다”고 언문체로 편지를 써놓고 가는 가난한 어머니.
손바닥으로 방을 닦으면서 머리칼을 쓸어내는 어머니.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어머니 주변의 사람들이 함께 보이기 시작한다. 겨울에 빨래하는 어머니를 떠올리자 어머니 말고 다른 사람들이 하나 둘 생각난다.
빨래터의 기억을 쓴 ‘동모동월(冬母冬月)’은 그 절창이다.
‘물가에 둥근 돌/ 빨래가 쌓였던 곳,/ 돌덩어리 가슴에 박혀 울던 사람들/ 물결에 씻겨가네// 물살 아래/ 누워 있네// 처녀들 모두 떠나가고/ 얼음 구멍에 손을 넣고/ 어머니 빨래를 끄집어내시네/ 죽은 처녀들 끄집어 내시네’
지금은 ‘희귀종’이라는 전업시인인 박씨는 출판사에 근무했던 적이 있었다. 출판사가 어려워져 인원을 감축한다는 말이 나오자마자 그는 사표를 냈다.
동료 시인 이윤학씨가 “내가 아는 박형준은 여린 사람”이라면서 돌이켜본 옛일이다. 지나칠 정도로 삶에 대한 저항감이 없다.
“어떻게든 살게 돼요”라면서 웃는다. 그 시인이 시집 뒤에 실은 ‘시인의 말’은 또 한 편의 시다.
‘멀리서 그가 바람의 신발을 신고 왔다. 먼 곳을 상상하는 동안, 온기 같은 그는 사라지고 차가운 신발이 남았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