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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이야기] (4)경주 천마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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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이야기] (4)경주 천마총

입력
2002.04.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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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고도(古都) 경주를 찾는 이들이 맨 처음 만나는 유적은 시내 여기저기에 마치 작은 산이나 언덕처럼 솟은 수많은 고총(高塚)들이다.이들 옛 무덤의 신비를 벗기기 위해 첫 삽을 뜬 곳이 155호 고분, ‘천마총(天馬塚)’이다.

당초 계획은 경주 고분 가운데 가장 큰 황남동 98호 무덤(皇南大塚)을 발굴, 내부를 복원해 공개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무덤은 워낙 규모가 클뿐 아니라, 그때까지는 이처럼 완전한 형태의 무덤을 체계적으로 발굴해 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그에 앞서 시굴(試掘) 대상으로 155호 고분이 선정됐다.

1973년 조사가 시작돼 4월 초 본격적인 봉토 제거 작업에 들어갔다.

발굴기간 내내 비다운 비가 내리지 않은데다 마른 태풍까지 겹쳐 예년에 볼 수 없었던 가뭄과 더위가 계속됐다.

발굴팀으로서는 다행스런 일이지만 주민들 사이에서는 “왕릉을 파헤쳐 큰 가뭄이 든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떠돌아 일부 주민은 현장에 몰려와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그해 7월 27일 저녁. 당시 문화재연구소 학예사였던 필자는 현장팀장으로 발굴에 참여했다.

바람 한 점 통하지 않는 돌무지 무덤 속은 말 그대로 찜통이나 다름 없었다.

그러나 현장에는 서늘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발굴단원들은 전날부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화려한 금관을 수습하느라 더위를 느낄 겨를도 없었다.

사위가 어둠에 싸여 희미한 백열등 아래서 마지막 사진 촬영을 마친 뒤 준비된 유물상자에 금관을 옮겨 넣기 위해 관 테(臺輪)의 한쪽 끝을 조심스레 들어올릴 때쯤, 별이 총총하던 하늘에서 난데없이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빗줄기가 점차 굵어지고 바람까지 몰아쳐 금관을 수습하던 조사원만 남고 나머지는 무덤 위를 덮어씌운 텐트의 기둥이 쓰러지지 않도록 묶어놓은 로프에 매달려야 했다.

한동안 요란스레 퍼붓던 장대비는 금관을 유물상자에 옮기고 나자 언제 그랬냐 싶게 뚝 그쳤다.

1,000여년 동안 지하에 편히 모셔졌던 혼령의 노여움이었을까.

이태 전 이맘때 백제 무령왕릉 발굴 당시 꼭 같은 상황을 겪었던 필자로서는 이날 갑작스런 천기의 변화가 결코 우연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나무관 안에서는 이밖에도 화려한 목걸이와 귀고리, 허리띠 등 각종 금붙이 장신구와 무기류가 나왔고, 발치에는 금동제 신발 한 켤레가 놓여있었다.

머리맡의 궤짝에서는 묻힌 이가 저승에 가서 쓸 수 있도록 그릇에서 마구까지 각종 부장품이 정연하게 안치돼 있었는데, 천마도가 그려진 말다래(흙가리개)가 눈길을 끌었다.

흰 말이 구름 위를 날고 있는 그림으로, 채색화로는 신라 유적에서 처음 나온 것이다.

무덤의 주인을 밝힐만한 자료도 발견되지 않아 결국 이 무덤의 명칭은 천마도가 나왔다 해서 천마총으로 부르게 됐다.

천마총 발굴에서 자신을 얻어 98호 고분 발굴도 곧 착수됐다.

그러나 이 고분은 남북으로 이어진 쌍분이라는 복잡한 구조 등으로 인해 복원에 어려움이 많아 결국 계획을 바꿔 원래는 시굴 대상이었던 155호 고분을 복원, 일반인에 공개하기에 이르렀다.

/ 지건길 국립중앙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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