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4월16일 독립운동가 오세창이 89세로 대구에서 작고했다. 오세창의 호는 위창(葦滄)이고 본명은 중명(仲銘)이다.중국어 역관이자 개화사상가인 오경석(吳慶錫)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22세에 박문국(博文局) 주사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오세창은 군국기무처 총재 비서관, 농상공부 참의, 우정국 통신원국장 등을 지냈다.
그는 1902년 망명지 일본에서 손병희(孫秉熙) 등의 권유로 천도교 신자가 되었다. 1919년 3ㆍ1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것도 손병희 등과 함께 천도교를 대표해서다. 오세창은 이 일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오세창은 구한말과 해방 직후를 언론인으로 보냈다.
한국 근대 신문의 효시인 한성순보(漢城旬報) 기자로 시작된 그의 언론인 생활은 나라의 운명이 저물어가던 시절의 만세보사(萬歲報社)와 대한민보사(大韓民報社) 사장을 거쳐, 해방 뒤의 매일신보사(每日新報社)와 서울신문사의 명예사장으로 이어졌다.
오세창은 또 뛰어난 서예가이자 서예 연구가였다. 그는 역대 한국의 서화가 1,117명에 대한 치밀한 사전인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을 비롯해 ‘근역서휘(槿域書彙)’, ‘근묵(槿墨)’이라는 서첩(書帖)을 잇따라 엮어냈다.
‘무궁화 땅’이라는 뜻의 ‘근역’은 물론 우리나라를 가리킨다. ‘근역서휘’와 ‘근묵’에는 대체로 고려 말에서 대한제국 말까지 인물들의 필적이 담겨 있다.
3책 첩장본(帖裝本)의 ‘근역서휘’에 글씨를 선보인 인사들은 국왕에서 중인을 거쳐 천민에 이르기까지 그 신분적 배경이 다양하다.
34책으로 구성된 ‘근묵’에는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 이용(李瑢ㆍ안평대군) 김시습(金時習) 민영환(閔泳煥) 등 주로 명사(名士) 1,306인의 친필 시와 서간이 수록돼 있다.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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