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와르라는 말은 프랑스어로 검다는 뜻이다.따라서 필름 느와르(Film Noir)라는 장르는 말 그대로 번역하자면 ‘검은 영화' 정도가 되겠다.
필름 느와르는 1930년대 미국의 공황기 동안 제작되었던 일군의 낙천적인 밝은 주제의 영화(뮤지컬, 스크루 볼 코메디)의 반대개념으로 1940년대와 50년대의 특정한 미국의 스릴러 영화를 지칭하는 영화 용어이다.
필름 느와르는 대개 탐정소설을 원안으로 하고, 스타일 상으로도 뚜렷한 공통 분모들을 지니고 있다.
어디선가 한번쯤 보았던 것 같은 화면들.
예를 들면 어두컴컴한 비에 젖은 도시의 뒷골목, 자동차 브레이크의 마찰음에 긴 그림자를 드리운 음영의 대조가 강렬한 이미지를 형성한다.
여기에 피곤한 탐정, 팜므 파탈(악녀), 타락한 사회 등의 코드는 필림 느와르를 아메리카 드림을 파산선고하는 사회 비판적인 장르로 만들었다.
존 휴스턴 감독의 ‘말타의 매’나 하워드 혹스 감독의 ‘빅 슬립’, 오손 웰즈의 ‘악의 손길’ 등은 대표적인 필름 느와르의 걸작들이기도 하다.
이 수명이 다한 것 같은 느와르를 표방한 영화들이 최근 한국에 나타나서 흥미를 끈다.
류승완 감독의 ‘피도 눈물도 없이’ 는 ‘펄프 느와르’라고 했고, 박찬욱 감독은 ‘복수는 나의 것’을 ‘하드 보일드 느와르’라 칭했다.
더욱 기묘한 것은 둘 다 느와르를 표방하고 있지만, 영화 문법상 전통 느와르를 충실히 답습하는 것이 아니란 점이다.
여기엔 묘령의 팜므 파탈이나 탐정 대신 우중충한 투견장이나 귀곡 산장같은 아파트를 배경으로 남자같이 완력을 쓰는 여자들이 버젓이 활보를 하고 다닌다.
어찌 보면 이들이 만든 한국의 이미지들은 거리에서 동냥질을 하는 가족을 보는 것 마냥 낯설고 기괴하다.
더 재미있는 것은 ‘피도 눈물도 없이’가 붉은 피가 철철 흐르는 빨간색 표 느와르라면, ‘복수는 나의 것’은 부조리한 블랙 유머가 지독한 검정색 표 느와르라는 것이다.
신장염의 고통으로 방바닥을 뒹구는 누나를 등 뒤에 두고도 소리를 듣지 못하는 류는 태연히 라면을 먹고, 신음 소리를 착각한 옆 방의 총각들은 자위행위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복수는 나의 것’은 과거 한국영화의 어떤 전통과도 스스로를 단절시킨다.
이건 정말 팬시한 연애담도, 통쾌한 복수담도, 눈물 나는 멜로도 시원한 조폭영화도 아니다.
아마 박찬욱 감독이나 류승완 감독이 한국에서는 제대로 시도된 적이 없었던 느와르를 만들겠다고 했을 때 그 속내란 내부는 부글부글 끓지만 표면은 차가운 점성이 강한 영화, 멜로나 조폭같은 장르적 관성을 벗어나는 새로운 영화를 만들겠다는 선언적 의미일 것이다.
결국 ‘피도 눈물도 없이’ 나 ‘복수는 나의 것’의 주인공들은 모두 자신이 왜 죽어가는지 모르는 채 죽어간다.
그렇다면 혹 신이 죄를 만들었고 오히려 인간은 그가 만든 죄의 대리인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한국의 이미지, 그리고 한국의 장르적 관습 자체를 전복시키며 이제 한국형 느와르는 작가주의를 꿈꾸는 젊은 감독들의 야심적인 승부처가 되어가고 있다.
영화평론가,
chinablue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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