컹, 컹, 컹, 개가 짖는다.기원 50년 전후 한반도 동남쪽, 현재의 경북 청도군 지역에 있던 고대 부족국가 이서국(伊西國)을 수호하던 36마리의 개가 2,000여 년의 시간을 뚫고 나타나 한꺼번에 짖어대며 봄날 오후를 흔들고 있다.
조덕현(45ㆍ이화여대 교수)씨의 현대미술 프로젝트 ‘이서국으로 들어가다’는 ‘가상 역사 발굴’이라는 이색 작업이다.
우리의 핏속을 흐르는 선조의 삶을 복원하려는 이 기획은 가상이지만 여느 고고학적 발굴보다 흥미롭고 미학적이다.
“미술의 장래, 미술의 희망에 대한 실험입니다”라고 발굴 현장에서 조씨는 말했다.
그는 이서국이 있던 것으로 알려진 경북 청도군 화양읍 백곡마을 조선시대 유학자 김일손(金馹孫) 가의 정자 일취정(一翠亭) 앞마당을 파고 철제 개 형상 조각 36개를 묻었다.
영남대 박물관 조사단은 실제 고고학 발굴 과정과 꼭 같이 이 유물을 발굴했다.
고고학자 나선화씨는 여기서 발굴된 유물의 고고학적 가치를 평가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구비문학자 최원오씨는 발굴작업의 전말을 기록했다.
프로젝트의 전 과정이 현실 같은 가상이다.
대숲이 봄바람에 소나기 소리를 내고, 주변 산야에 복사꽃이 만개한 발굴 현장은 유서깊은 정자와 그 앞마당 구덩이에서 튀어나온 36마리 개의 형상이 어우러져 기묘한 미감을 준다.
이번 프로젝트는 지난해 여름 우연히 서 림(46ㆍ대구대 교수) 시인의 시집 ‘이서국으로 들어가다’를 읽은 조씨의 영감에서 비롯됐다.
서씨의 시집은 자신의 고향 청도 지역의 현실을 거기 있었던 부족국가 이서국에 대한 신화ㆍ구전과 상상력으로 연결시킨 시편으로 엮여졌다.
‘이서국은 살았을 땐 많은 청도 사람 밖에 나가 있더니/ 그것은 죽자 모든 청도 사람 속에 들어와 영원히 살아있다// 불개가 되어,/ 청도땅에 큰 이변이 생길 때면/ 하늘 올라가 해를 삼키는’(‘이서국으로 들어가다 2 ~ 불개’ 부분).
서씨는 시집에서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와, 삼국유사 권1 ‘이서국’ 편에 신라를 치다가 오히려 멸망한 것으로 짤막하게 등장하는 이서국의 역사를 현재의 청도 시골장터와 소싸움터의 모습 등으로다시 풀어냈다.
“시집을 읽자 마자 바로 서교수에게 전화했지요. 그리고 둘이서 스무번도 넘게 청도를 여행했습니다.” 두 사람은 일취정 앞에 개를 묻기로 했다.
조씨는 개 숭배 사상을 유목민족에 공통적인 ‘몽골리안 코드’로 본다.
이서국은 인근 경주 감포의 바닷길을 통해 유입된 북방 철기문화를 한반도 어느 곳보다 앞서 개화시켰고, 그 발달한 문화를 신라에 전해주고 멸망했다는 것이 두 사람의 가설이다.
36마리의 개는 바로 이서국의 철기문화를 지키는 수호 형상이다.
조씨는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1월까지 프랑스 파리 쥐 드 폼 미술관 앞에 구덩이를 파고 20마리의 개 형상 조각을 땅에 파묻은 뒤 그것을 다시 발굴하는 과정을 보여준 ‘아슈켈론의 개 ~ 낯선 신을 향한 여정’ 프로젝트로 국내외 미술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작가.
이제 그의 몽골리안 코드가 한국 땅 청도로 옮아온 것이다.
“미술은 어쩌면 간단합니다. 오브제일 뿐이지요. 신화가 접목될 때 그것은 비로소 대중과 호흡할 수 있는 탄력을 가집니다.”
조씨의 말처럼 막 진흙탕에서 뛰어오를듯한 이서국의 개들은 시간의 어둠을 뚫고 나와 역사와 현실을 연결시키는 신화적 상징처럼 보인다.
백곡마을과 경주시 보문호 인근 두 곳의 가상 발굴현장 전시는 6월 30일까지 계속되며, 경주 아트선재미술관(054-745-7075)에서는 5월 19일까지 90년대 초반 이후 조씨의 회화ㆍ설치 대표작 10여 점이 전시된다.
청도= 하종오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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