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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론] 상대의 이념을 존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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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론] 상대의 이념을 존중하라

입력
2002.04.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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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정치권에서 이념논쟁이 한창이다.여당의 경선이 이념공방으로 달구어지더니, 원조보수를 자처하는 최병렬씨와 진보 경향의 이부영씨가 야당의 경선에 뛰어들어 다시 이념경쟁이 펼쳐질 전망이다.

이런 새로운 선거쟁점을 보면서 인물중심의 정치, 지역중심의 정치가 서서히 쇠퇴하고 있음을 실감한다.

그런 공개적 이념투쟁이 신선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과거의 정치논리가 어떤 식으로든 깨지고 있다는 사실, 바로 그 사실을 일깨우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더욱이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논쟁을 통해서 극단을 피하는 제3의 길이 제 몫을 찾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극우와 극좌 모두 냉전시대의 논리를 재생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중도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그러면 중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한 중간이 아니라 만나게 하는 중간일 것이다.

서로 떨어져 있던 극단이 만나서 서로 한계를 드러내는 중간, 그렇게 드러난 한계와 여백 때문에 점점 뚜렷하게 방향을 잡아가는 길이 진정한 의미의 중도다.

그러므로 그것은 이미 정해진 길도, 한 번에 정할 수 있는 길도 아니다.

어쩌면 답 없이 떠나야 할지도 모르는 길, 계속 답을 만들어 가야 하는 길, 답보다는 오히려 문제를 만들어 가야 하는 길일 것이다.

이런 중도의 길을 방해하는 가장 커다란 장애물은 특정 이념을 절대화하는 버릇이다. 그것은 버릇이라기보다 어떤 오류, 개념과 이념을 혼동하는 오류다.

객관적 의미를 지시하고 그 참됨을 증명할 수 있는 것, 그것은 개념이다.

반면 이념은 개념들이 어떤 조화로운 체계를 이루기 위해서 반드시 설정해야 하는 어떤 임계점이다.

이 지점은 어떤 문제가 처음 설정되는 장소이고, 개념은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한 도구이다.

가령 보수파는 국가의 대외적 경쟁력을, 진보파는 부의 대내적 분배를 최고의 문제로 설정한다.

그러나 이렇게 설정된 문제는 객관적 시시비비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개인과 계층,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희망이다.

이런 이념이 개념으로 전락하여 그 의미가 절대화할 때 제3의 길은 사라진다. 중도만이 아니라 민주주의 자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

하나의 이념이 절대화할 때 독단과 독재가 횡행하기 마련 아닌가.

민주주의를 활성화한다는 것은 개념으로 고착된 이념, 그것이 잃어버린 문제설정 기능을 되살리는 것과 같다.

어떤 이념이든 그것이 본래 지시하던 문제 자체를 존중하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다.

그러나 이념은 묘한 것이다. 이념이 주관적이라 해서 취미를 선택하는 것처럼 이념을 선택할 수 없는 노릇이다.

역사적 현실은 끊임없이 새로운 결단을 요구하며, 그 결단은 언제나 선택의 기로를 통과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념의 선택은 한 개인이나 공동체에게 권리상 자유로운 것이라 해도 사실상 강제적이다.

이는 마치 총을 앞세운 강도가 '돈을 선택할래 목숨을 선택할래' 할 때와 동일하다.

선택은 자유이지만 누구나 목숨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데, 돈의 선택은 목숨의 상실로, 목숨의 상실은 다시 돈의 상실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기서 강요된 것은 상실을 수반한 선택, 즉 돈 없는 목숨의 선택임에 주목하자.

이념의 선택은 그런 것이다. 그것은 공동체의 목숨과 이어진 긴박한 문제의 선택이다.

하지만 어떠한 선택이든 어떤 상실을 수반할 수 밖에 없고, 따라서 어떠한 선택도 영원한 선택일 수 없다.

숨쉬는 역사는 상실된 것의 회복을 향해서 다시 굴러가기 마련 아닌가.

만일 이념이 돈은 빼앗되 목숨은 살리는 강도라면, 이런 상대성을 무시하는 이념논쟁은 목숨까지 앗아가는 강도일 것이다.

그러므로 올해의 선거가 우리 사회의 창조적 쇄신으로 이어지는 축제가 되려면, 후보들이 상대의 이념을 존중하는 법부터 배워야 할 것이다.

요컨대 흑백논리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김상환 서울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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