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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세한 현인 노래와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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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세한 현인 노래와 인생

입력
2002.04.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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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르 떠는 특이한 창법 '시대의 풍류객'‘아-아 신라의 밤-이-여-/ 불국사의 종소리 들리어온다/ 지나가는 나그네여 걸-음을 멈추어라/고요한 달-빛 어린 금-오산 기슭에서/ 노래를 불러본다 신라의 밤- 노래를-’

해방의 기쁨이 채 가시지 않은 1947년. 사람들은 이제까지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노래에 귀와 마음을 빼앗겼다.

바로 ‘신라의 달밤’ (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이라는 특이한 제목의 노래였다.

휘영청 달빛이 드리워진 산사에서 술 한잔 걸친 풍류객이 고도 경주를 내려다보며 흥얼거리는 듯한 가사에 이국적인 멜로디, 첫 마디를 시원하게 내지르고는 곧바로 부르르 떠는 특이한 창법.

사람들은 한번 듣고도 절대 잊어버릴 수 없었다. 리듬도 당시 국내 가요에서는 한번도 시도된 적이 없었던 스페인 무곡 볼레로였다.

‘신라의 달밤’이 처음 등장한 서울 명동 시공관은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였다.

당시 28세의 신인은 관객들이 ‘앵콜’을 연발해 그 자리에서 9번이나 불러야했고, 마침내 관객들까지 그 노래를 외워 함께 불렀다.

중국 상하이에서 귀국한 지 얼마되지 않아 악극단을 전전하던 무명 가수였던 현인은 그 순간 스타가 됐고, 55년 동안 ‘신라의 달밤’은 그의 호가 됐다.

데뷔 몇 달 전만 해도 현인 자신은 물론 누구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일본 우에노(上野)음악학교 성악과를 졸업한 바리톤 가수가 천박한 대중가요를 부른다는 것부터가 반란이었다.

생전의 현인은 “내가 유행가나 부르고 있어야 되나 싶었지만 우연히 알게 된 박시춘의 악보를 받아보는 순간 생각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성악의 발성에 근거한 그의 창법이 그를 대중스타로 만든 셈이다.

이어 곧바로 내놓은 트로트곡인 ‘비 내리는 고모령’은 일제시대 국민들의 아픈 실향의 기억을 되살린 노래로, 현인을 그야말로 ‘국민가수’로 만들었다.

그는 한 장르에, 한 노래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1947년 한 해 동안 그는 박시춘 유 호와 손잡고 무려 5곡을 히트시키면서 ‘현인시대’를 열었다.

1946년 2월 귀국선을 타다 중국 군인들에게 체포돼 4개월 동안 베이징 형무소에 있을 때 서울을 생각하며 그가 만들었던 탱고 멜로디는 유호의 가사로 ‘서울 야곡’으로 탄생했고, 그가 즐겨부르던 중국노래는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하는 죄이라서…’로 시작하는 애절한 ‘꿈속의 사랑’이 됐다.

그의 팔색조 노래들은 1950, 60년대 격동의 시대 서민들의 아픔을 쓰다듬어 주기도 하고, 향수를 달래기도 하고, 희망을 심어주기도 했다.

51년 1.4 후퇴 직후에 발표한 ‘굳세어라 금순아’는 그의 인생에서 절대 잊을 수 없는 노래가 되었다.

흥남 부두에서의 이별을 노래한 이 곡은 전쟁 통에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며 오직 살아야 한다는 일념만으로 버티고 있던 사람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의지를 심어주었으며, 월남 가족들의 애창곡이 됐다.

그는 52년 ‘전우야 잘 자거라’로 군인들의 가시를 높였고, 53년 ‘럭키 서울’로 서울수복의 감격을 목청껏 외치게 했다.

그는 또 그 무렵 서구의 새로운 음악을 국내에 소개하는 전령사이기도 했다. 샹송, 칸초네, 탱고, 맘보 등이 그를 통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베사메무쵸’나 ‘고엽’ 등의 번안곡도 그의 입을 거치치면서 히트곡이 되었다.

그 시절의 고통이 너무 컸기에 사람들은 50여년이 지나도 그의 노래에 담긴 정서를 기억한다.

지금도 40대 이상이라면 술 한잔 걸치고 노래방에 가서 그의 노래 한곡쯤은 부르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노가수로는 드물게 현인은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도 낯설지 않다.

모창의 단골 메뉴가 되어버린 ‘신라의 달밤’, ‘에스 이 오 유 엘’을 반복하는 ‘럭키 서울’의 재미난 노랫말 등이 특이하고 재미난 것을 선호하는 요즘 세대와 그를 묘하게 연결시킨다.

또한 지난해 제목까지 같았던 영화 ‘신라의 달밤’에서처럼 그의 노래는 요즘 식으로 리메이크 해도 손색이 없다.

인간 현인은 자신이 부른 노래만큼이나 유쾌한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다.

일흔 살이 되던 해에도 “몸은 70 노인이지만 아직도 내 마음은 10대 소년과 같다”고 했을 정도. 일제 시대에 영국 스탠더드 석유회사를 다녔던 아버지와 신여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부족함이 없이 자란 탓에 그늘이 적었다.

그가 외국의 노래를 많이 알고 성악을 전공했던 것이나 클래식을 전공한 것도 대중 가요 가수가 된 것도 따지고 보면 개방적인 환경에서 풍족하게 자란 유년기의 경험 때문이기도 하다.

현인은 74년부터 81년의 7년 동안만 무대를 떠났다.

미국으로 이민 간 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스라이트’라는 레스토랑을 운영했지만 한국과 무대를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결국 7년 만인 81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자신의 본업이 가수라는 것을 다시 절감한 만큼 나이에 구애 받지 않고 기회가 닿는 대로 무대에 섰다.

98년까지도 배삼룡 은방울 자매 남진 김세레나 문주란 등과 악극 ‘그 때 그 쑈를 아십니까’를 시작했다.

사람 좋아 보이는 호탕한 얼굴. 팔순의 나이에도 그는 젊었을 때와 다름없이 흥취를 간직한 목소리로 힘차게 노래했다.

이제는 다시 들을 수 없는 그 목소리. 하지만 우리가 1950년대를 기억하듯이, 그가 부르는 ‘신라의 달밤’은 그가 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언제까지나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김지영기자

koshaq@hk.co.kr

●현인 연보

▦ 1919년 경남 구포(龜浦) 출생, 본명 현동주(玄東柱)

▦ 1938년 제2고보(현재 경복고)졸업

▦ 1942년 일본 우에노(上野)음악학교 성악과 졸업

▦ 1943~1946년 악단‘신태양’을 조직해 중국 상하이에서 활동

▦ 1946년 귀국 후 악극단 ‘19번가’조직

▦ ‘신라의 달밤’ ‘비 내리는 고모령’ ‘굳세어라 금순아’ ‘서울 야곡’ 등 1천여 곡을 부름

▦ 1~3대 대한가수협회장, 한국전쟁 종군연예인 공로패, 제6회(1999년) 대한민국 연예예대상(문화훈장)

■빈소 표정

14일 고인의 빈소에는 박호 연예협회 명예이사장을 비롯한 원로가수 '전선야곡'의 신세영,'청실홍실'의 안다성,은방울자매와 코미디언 구봉서,작곡가 하기송,석현 종군참전 연예인협회 회장,남진 한국연예협회 이사장 등이 찾아와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한나라당 이회창 전 총재,정원식 전 국무총리,가수 하춘화씨 등도 조화를 보내왔다.

안다성(73)씨는 "해방 전까지는 고음과 미성을 구사하던 남인수 백년설 고복수씨 등이 가요계를 주도했지만,현인이 등장하며서 가요계 판도가 바뀌었다"고 회고했다.

구봉서(77)씨는 "해방 직후 극장쇼 사회를 볼 때 현인과 남인수의 인기 경쟁이 볼 만했다"며 "당뇨병이라는 소식을 듣고 몇 번이나 병문안을 가려 했지만 거절해 이제서야 오게 됐다"고 말했다.

부인 김미정씨는 "'그때 그 쑈를 아십니까'공연 이후에는 외출을 못할 정도였다"면서 "최근 들어서는 추한 모습을 보이기 싫다며 면회객도 만나지 않았다"고 고인의 마지막 모습을 전했다.

■현인兄 영전에

-유호-

玄 仁.

두 말 할 것도 없이 그는 우리나라 가요계의 큰 별이었다.

5년 전 작고한 작곡가 박시춘(朴是春) 같은 분은 “그(현 인)와 같은 가수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박시춘 현 인 유 호, 세 사람의 만남은 1947년 ‘신라의 달밤’으로 시작된다.

정동 방송국에서 방송작품을 쓰고 있던 나는 방송국 초대 경음악 단장이었던 박시춘의 부탁으로 생전 처음 가요의 작사를 했다.

그는 일제 때부터 키워온 남인수(南仁樹)에게는 그 노래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던지, 새로운 가수를 찾던 중 현 인을 소개받았다.

만나보니 코가 크고 잘 생긴 것이 서양사람이 되다만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고 농담삼아 얘기한 적이 있다.

그보다도 노래를 들어보니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한 창법, 가사와 노래의 표현과 해석력이 작곡가를 매료시켰다.

그래서 ‘신라의 달밤’ 하나로 현 인은 태어났고, 역시 세 사람이 만든 ‘고향만리’ ‘럭키 서울’ ‘서울야곡’ ‘비 내리는 고모령’ 등등이 이어지면서 현 인은 한 시대를 풍미하는 불멸의 가수가 되었다.

그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인 1991년 10월 대구 달성공원에 세워진 ‘비 내리는 고모령’ 노래비 제막식에서였다.

2000년 1월 경주에 건립된 ‘이별의 부산 정거장’ 노래비 제막식에는 신병으로 인해 참석을 하지 못했다.

14일 새벽, 그의 부음을 접한 나는 끊었던 담배를 피어 물고 마당을 서성대며 한동안 자책의 념으로 마음이 아팠다.

중학교 1년 선배(제2고보ㆍ第二高普ㆍ현 경복고)이고 해방 직후부터 6ㆍ25를 전후한 수년 동안, 작품을 같이 한 사이였던 내가 그의 병상을 한번도 찾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에 관한 일화는 많다. 진위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그 중 이런 것도 있다.

‘신라의 달밤’이 발표돼 세상이 떠들썩할 때, 통행금지 시간에 걸려서 입초(立哨) 순경이 “정지! 누구요?” 하면, “나, 신라의 달밤요!” 그러면 “아, 그러십니까. 통과!” 했다는 것이다.

현 인 형.

학교시절엔 배구선수로 뛰었고 스포츠를 좋아하던 형이 2002년 월드컵 개막식에서 노가수답지 않은 당당한 모습으로 월드컵 찬가를 부르는 모습을 보여주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신라의 달밤 작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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