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한국전쟁의 화약과 피범벅의 냄새가 채 가시지 않았을 당시, 나는 배고픈 것 못지 않게 지식에 목말랐었다.당시 내가 살던 김포공항 부근 미군 부대에서 버리는 신문 잡지 책 속엔 보물이 섞여 있었다.
오락잡지와 만화도 재미있었고 휴대용 성경도 영어공부를 겸한 기독교 이해에 도움이 됐다.
그 중에서도 잊을 수 없는 것은 54년 접한 아그네스 스메들리의 ‘Battle Hymn of China‘였다.
이 책은 스메들리가 팔로군 신사군 등에 종군하며 중국의 항일운동에 대해 쓴 것이다.
중국의 싸움터에 뛰어들어 여자의 몸으로 세계 최초로 연안의 마오쩌뚱(毛澤東)과 저우언라이(周恩來) 등 중국 공산당 지도자를 세상을 알린 이 책은 내용이 흥미로웠다.
이 책을 인연으로 에드가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 별’ 그의 부인 님 웨일스의 ‘아리랑’을 읽으며 아시아 민중의 문제에 눈을 떴다.
그러한 관심은 90년대 안소니 그레이의 소설 ‘베이징’과 ‘사이공’으로까지 이어졌다.
50년대는 배고프고 삭막하고 슬픈 시절이었다.
53년 나는 이승만의 부산정치파동을 비난하고 소련제 미그기의 한국전 참전을 말하다 경찰에 끌려갔었다.
이유인 즉 국부(國父) 나랏님인 대통령을 욕하니 되먹지 못하고 이상한 놈이란 것이고, 미그기가 수풍댐을 폭격하던 미국의 B29기를 격추한 것을 떠드니 빨갱이라는 것이다.
때리니 맞았고 말 같지 않아 대들다가 또 맞았다.
나는 잘못이 없다고 생각했고 바로 이래서 빨갱이 몰이가 무섭고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 뒤 스메들리의 책을 읽으며 만사를 똑바로 봐야 한다는 것을 확실히 배우게 됐다. 그의 책을 통해 중국과 베트남의 문제가 제3세계 식민지 문제의 하나라는 생각도 갖게 됐다.
나의 독서편력은 법학자로선 이색적으로 보여서 외도라고 여기는 이도 있다.
그러나 그런 관심과 시사 감각이 65년 베트남참전을 잘못된 것으로 볼 수 있는 안목도 키워준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스메들리 책과의 인연은 나를 편협한 법조문 해석의 틀에서 벗어나게 해준 것이다.
* ‘Battle Hymn of China’는 ‘중국 혁명의 노래’라는 이름으로 85년 국내에서 출판(사사연 발행)됐으나 지금은 절판된 상태입니다.
/ 한상범 동국대 법대 명예교수ㆍ민족문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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