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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매헌 윤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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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매헌 윤봉길

입력
2002.04.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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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4월 중국 상하이(上海) 백범 김 구 선생 거처에 헌헌장부 한 사람이 찾아 든다. 나라 찾는 일에 무언가 할 일이 없겠느냐는 것 이었다.얼마 전 이 봉창 의사의 일본 천황 저격 미수사건을 안타깝게 여긴 청년은 그런 거사계획이 있으면 나를 써달라고 했다.

백범이 4월29일 홍커우(虹口)공원에서 열릴 천장절 행사 단상에 폭탄을 던질 거사계획을 말하자, 그는 “내가 할랍니다. 이제 마음이 편합니다” 했다. 스물 다섯 청년 윤 봉길의사 였다.

■ 충남 예산 출신인 그는 스물 세살 때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는 유서를 써놓고 중국으로 건너간다.

만주 다롄(大連) 칭다오(靑島) 등지를 거쳐 상하이에 도착한 그는 말총모자 공장 직공, 채소장사 등으로 떠돌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큰 일을 하겠다고 임시정부를 찾아 갔다.

천황 생일 축하행사 참석자는 물통과 도시락(벤또)을 지참하라는 포고를 보고 백범은 도시락 폭탄 준비에 착수했고, 윤 의사는 말쑥한 양복차림으로 날마다 현지답사를 다녔다.

■ 거사 전날 백범은 윤 의사와 둘이 선서식을 가진 뒤 기념으로 손목시계를 사주었다. 그리고 오늘 밤 하고싶은 것을 맘껏 하라고 큰 돈을 쥐어 주었다.

다음 날 아침식사를 함께 하고 헤어질 때 윤 의사는 시계를 풀어 백범에게 주었다.

“제것은 6원짜리고 선생님 것은 2원짜리니 바꿉시다. 앞으로 한 시간 뒤면 시계는 쓸모가 없으니까요.”

목숨을 내놓는 일을 하러 가면서 그는 그렇게 태연했다. 갖고 있던 돈을 모두 내 놓고 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

■ 엊그제 신문에 난 윤 의사 최후 사진을 보며 마지막 순간까지 민족혼에 불타는 모습에 충격적인 감동을 받았다.

총살 집행 직전과 직후의 순간을 비교하면, 이마에 총을 맞은 직후 윤 의사는 고개를 빳빳하게 치켜 든 모습이다.

피격 순간 고개가 밑으로 꺾이는 것이 이치인데, 반대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의식적으로 고개를 쳐든 것인가.

아무리 의지가 굳어도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민간인은 교수형이라는 관례를 깨고 총살을 하면서, 일제는 거적 위에 무릎 꿇려 총을 쏘았지만 윤 의사의 범 같은 기개만은 꺾지 못하였다.

문창재 논설위원실장

cjmo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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