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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속으로] 스코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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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속으로] 스코필드

입력
2002.04.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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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4월12일 영국 출신의 의학자 겸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가 82세로 작고했다. 스코필드는 한국과 깊은 인연을 맺었던 외국인이다.1916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연세대 의과대학의 전신)의 세균학 교수로 부임하며 한국과 첫 인연을 맺은 그는 세 해 뒤 3ㆍ1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열의를 지니고 이 운동에 협력했다.

유명한 제암리(堤岩里) 학살사건이 터지자 그는 현장으로 달려가 그 참혹한 광경을 사진에 담았고, 이 사진들을 기초로 작성한 ‘수원에서의 잔학 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미국에 보내 한국 독립운동에 우호적인 여론을 만들어냈다.

일제는 이듬해인 1920년 스코필드에게 국외 추방 명령을 내렸다. 한국을 떠난 뒤 캐나다 대학에서 의학을 가르치던 스코필드는 195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10주년 경축식전에 초청됐고, 11년 뒤인 1969년에 한국에 정착해서 여생을 보냈다. 그의 한국 이름은 석호필(石好必)이다.

스코필드 강제 출국의 빌미를 만든 제암리 학살사건은 3ㆍ1운동 당시 일제가 조선에서 저지른 학살 사건 가운데도 잔혹성이 두드러졌다.

1919년 4월15일 오후 2시께, 육군 중위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가 이끄는 일본 군경은 경기도 수원군(지금의 화성군) 향남면 제암리 교회에 어린아이들을 포함한 기독교도 30명을 가둔 뒤, 집중 사격을 하고 교회에 불을 놓아 전소시켰다.

교회당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처참하게 죽었다. 일본 군경은 이어 인근 교회 건물과 민가 등 30여 호에 불을 질러 다수의 사상자를 냈다. 제암리에서는 그보다 며칠 앞서 기독교도들을 중심으로 독립만세 시위가 벌어졌었다.

학살은 그 시위에 대한 보복이었다. 제암리 학살 현장은 사적 제299호로 지정됐다.

고종석 편집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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