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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4)시인 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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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4)시인 고은

입력
2002.04.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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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늦게 돌아오는 길에 별들을 본다. 그제서야 별들이 먼저 지상의 나를 보고 있었다는 것을 안다.어떤 비관론자와도 무관하다. 이 세상에는 다른 세상을 위한 종말이 있다. 이 세상은 수많은 흥망성쇠의 시간과 장소만이 아니라 마침내 흥망성쇠 그 자체인 것이다.

그렇다 해서 종말이 언제냐고 섣불리 따지려 들지 말라. 다만 그런 세상에서 엄연히 살아가는 것이 너와 나이다. 나의 문학은 이런 세상의 일부분이다.

왜 문학을 하는가? 왜 시를 쓰는가?

비 온 뒤의 앞산처럼 확실한 이런 질문으로 나는 문학을 하지 않는다. 그저 시인이 되고 싶었을 뿐이다. 밀물이었다. 그저 시인이 되었을 뿐이다. 썰물이었다.

시인 노릇 45년이 어느덧 되어가는 오늘에도 이 노릇에 대한 어떤 가설도 마련되지 않았다. 일의(一義)란 죽어라고 싫다. 굳이 말하자면 불가피성 말고는 내 삶의 궁핍한 역정 가운데서 문학의 이유를 찾아낼 다른 여지가 없는지 모른다.

풍경이 시작되었다. 1940년대 후반 중학생이 된 나는 4㎞ 거리의 학교와 집 사이 황톳길을 걸어 다녔다. 비오는 날은 우산 대신 도롱이를 걸쳤다.

한국전쟁 이전까지 약 4년 동안 이런 길을 오고 갔으므로 길 가녘 우거진 여름날의 각시풀과 꿀먹은 벙어리 같은 돌멩이도 한 핏줄인 양 정이 사뭇 들었다.

방과 후 거의 혼자 돌아오는 시간이 누구에게도 발설하기 싫은 행복이었다. 호젓할 때면 나는 내 동무가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혼자서 복수(復數)였다.

길은 어쩌다 만나는 장꾼이나 소달구지 말고는 비어 있었다. 미술반은 자주 늦게 끝났으므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저녁 무렵이기 십상이었다.

혼자 길을 걷는 동안 나는 학교와 집의 의무로부터 지극히 자유로웠다. 그런 시간으로 너무 일찍부터 낮 동안의 끝인 저녁에 익숙해졌다.

지나는 길의 마을마다 밥 짓는 저녁 냉갈이 저기압의 땅 위를 가득히 깔려 있을 때의 그 형언할 수 없는 경건한 향수는 한 소년에게 감수성의 근원이 되어 주었다.

새벽의 수탉 우는 소리, 아침 거미줄에 매달린 이슬 보석들과 동정(童貞) 같은 햇빛 소나기, 그리고 대낮의 갑작스러운 적막…들도 찬란한 환경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것들이 어떻게 나의 저녁 무렵만 하겠는가.

하루 내내 들에서 일한 다음 해가 진 뒤의 연장을 물에 씻어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농부의 일과에 어느덧 나도 속해 있었다. 저녁은 그렇게 숭고하고 슬펐다.

‘돌아오다’, ‘돌아가다’라는 말이 나에게 달라붙던 것도 그 무렵이었다. 한자 ‘귀(歸)’자가 어쩌다 친정 나들이하는 여자의 기쁨을 담고 있다면 인간의 본성 안에 그런 귀향의 심상이 바닥져 있는 것 아닌가.

나중에 내가 쓴 시 중에 유난히 저녁이 많이 나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른 시인들에게도 저녁은 하나의 주조(主調)였다.

그런 저녁 무렵 나는 꺼므꺼므한 어슬녘을 걷고 있었다. 집을 1㎞쯤 남겨놓은 길 한복판에서 한 물체를 발견했다. 그 우연이야말로 필연이었다.

그 물체는 마치 오랜 발광체처럼 팍 저물어버린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책이었다. 나는 사방을 두리번거릴 겨를도 없이 그 책을 집어 들었다. 새 책이었다.

시집이었다! 한하운(韓何雲) 시집이었다!

온몸이 전류에 휘감겨졌다. 그 시집 속의 글자 하나하나를 어둠 속에서 뿌리째 뽑아내어 읽어갔다. 돌부리에 넘어졌다가 일어났다.

아마도 누군가가 사 가지고 가다가 그만 길에 잘못 떨어뜨린 것이리라. 그 시집의 임자를 찾아 나설 생각 따위가 전혀 없었다. 시집은 오직 나를 위해서만 거기 있었던 것이다.

그날 밤 시집을 읽고 또 읽었다. 읽으면서 엉엉 울었다.

가도 가도 황톳길….

이 구절은 곧장 내 심장 속의 주술이 되어 주었다. 밤새 뜬눈이었다. 조영암과 최영해라는 사람의 발문도 몇 번이나 읽었다. 먼동이 텄다.

두 가지를 결심했다. 나도 한하운처럼 문둥병에 걸려야겠다는 것과 나도 시인이 되어 이 세상의 모든 길을 걸어가며 떨어져나간 썩은 발가락을 노래하고 이 세상의 길을 노래하겠다는 것이 그것이다.

‘한하운시초(韓何雲詩抄)’ 이후 나는 다른 학생들과 달랐다. 그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이고 나는 남몰래 철이 들어버린 ‘어른’이 되었다. 점점 미술반이 싫어졌다. 교내 미술 전시회에서 받은 일등상의 기쁨은 시 앞에서 무색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수채화에서 유화로 옮겨가야 했다. 그 뿐 아니라 미대를 갓 나온 교사 안태훈은 나에게 풍경화, 정물화 그리고 인물화까지도 강요했다. 아니 자신의 시내 작업실로 나를 데려다가 모델 그림까지 그리게 할 것이라고 다그쳤다.

이렇듯이 학교에서는 장래의 화가였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는 내일의 시인이었다. 시인이기를 얼마나 열망했던가.

그런데 바로 1년 전만 해도 나는 화가가 되기를 꿈꾸고 있었다. 외삼촌의 서가에서 반 고흐 전기를 꺼내 보았을 때 나는 ‘오직 고흐이리라. 그렇지 않으면 무이리라’라고 책상머리에 써 붙이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이 다음에 시인에의 열망이 다른 것이 되고 싶은 나머지 한때의 열병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그런 가정 때문에 고통스러웠다.

시 혹은 문학은 반드시 그 시대의 어떤 상흔에서 그 의미를 이끌어낸다. 시인은 그러므로 상처받은 혼신(魂身)이다. 나에게 시는 전쟁 이전의 꿈과 전쟁 이후의 절실성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북위 38도선이 무너졌다.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그해 6월 27일 학교는 무기 휴교조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걸핏하면 발생하던 단정 반대의 좌익 동맹휴학도 그 뒤를 이은 이승만 지지의 우익 결의대회도 사라져 버린 학교 운동장은 바람이 불면 먼지 구름이 몰려가거나 하루 내내 뻐꾸기 소리만 쌓여 있었다.

더 이상 나에게는 호젓한 저녁길이 없었다.

여름 3개월 동안 내 또래의 인민군 병사와 인민위원회 그리고 민청, 여맹 따위의 붉은 완장에 익숙해졌다. 담배를 배웠다. 엽연초를 잘게 썰어 그것을 종이에 말아 피웠다.

전선은 낙동강 중류까지 남하했고 진주 남강도 떨어져 나갔다. 9월의 인천 상륙과 함께 거듭된 후퇴가 역전되어 압록강 강물을 떠오기까지 했다. 다시 1ㆍ4 후퇴가 있었다.

이 과정에서 내 고향은 우익의 좌익 학살, 좌익의 우익 학살, 다시 우익의 좌익 학살의 보복으로 살벌한 죽음의 지역이었다. 한국전쟁 인명 희생자 300만 중 1만분의1을 내 고향이 담당한 것이다. 몸에서 썩은 학살 시체 냄새가 15일 이상 없어지지 않은 채 살아 남았다. 나는 여름 나무 그늘에서 읽었던 신석정 시집 ‘촛불’을 아주 덮어버렸다. 시는 그 야만의 계절에 대해서 무능했다.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가 가능한가”라고 외친 아도르노의 말은 한반도에도 적용되고 남았다.

한국시 50년대 후반 또는 60년대 전반의 모더니즘은 그것이 서구 모더니즘의 뒤늦은 모방을 모면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한국전쟁이라는 거대한 상황을 통한 전통 단절과도 깊이 관련된다. 요컨대 전쟁은 시를 묻어버렸고 역설적으로 다시 시를 불러들였다.

나는 널브러진 시체더미 앞에서 인간의 정체를 다 알아버린 듯한 허무에 사로잡혔으며 고향을 떠난 뒤 내내 떠돌았던 모든 산야와 도시는 폐허에 다름 아니었다.

내 문학은 그런 폐허를 떠도는 자의 비가(悲歌)이기를 자처했다. 그래서 시의 본적지는 폐허이고 시의 현주소는 폐허의 기억을 가진 미완의 역사 현장인 것이다.

세 살 무렵의 아이는 “왜?”로부터 세상을 시작한다. “왜 아빠의 젖은 젖이 안 나와?” “왜 엄마 구두하고 아빠 구두하고 달라?”

이런 의문이 인간을 다른 생명체와 구별짓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문학에서, ‘왜 문학을 하는가’라는 질문은 세 살 무렵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것은 문학의 오늘에 있어야 할 새로운 해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문학의 힘은 해답에 있지 않고 치열한 질문에 있다.

●연보

▲1933년 전북 군산 출생

▲1952년 해인사에서 출가·법명 일초

▲1958년 조지훈의 천거로 '현대사'에 '폐결핵'발교 등단·1962년 환속

▲시집 '피안감성''문의 마을에 가서''새벽길''조국의 별''만인보''백두산''두고 온 시'등

▲한국문학작가상(1974) 만해문학상(1988) 중앙문화대상(1991)대산문학상(1993)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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