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리극의 대가 해롤드 핀터는 영국 태생의 유대인이다. 영화 '프랑스 대위의 여인' 각본도 쓴 그가 여러 예술가들과 함께 성명을 냈다.모든 양심적 지식인은 팔레스타인을 압살하려는 이스라엘 규탄에 동참하라는 내용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행동은 누대에 이어질 복수극을 부를 뿐이라고 경고했다.
성명이 나온 지난 주말 이슬람 권은 물론이고 유럽과 미국 중남미, 이스라엘에서도 샤론 총리 정부의 강경 정책을 규탄하는 시위가 물결 쳤다. 이스라엘을 나치에 빗댄 시위 플래카드까지 등장했다.
포르투갈의 노벨상 작가 사라마구는 이스라엘군이 짓밟은 팔레스타인 라말라를 나치 수용소 아우슈비츠에 비유, 이스라엘에 충격을 주었다.
유대 민족의 2,000년에 걸친 이산(離散)과 고난을 극에 이르게 한 나치에 비유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도덕적 기반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 것이 뿌리깊은 분쟁 당사자의 선악을 최종 심판할 수는 없지만, 한때 빛나던 이스라엘의 영광이 스러지고 있음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안팎의 양심적 지식인들의 목소리는 강경 대세에 억눌린다. 생존을 건 대치에 익숙한 사회의 특성이다.
팔레스타인 민중을 점령지에서 내몰 수 없고, 아라파트 자치정부 수반을 죽일 수 없고, 자살 폭탄테러를 종식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후퇴와 양보는 받아 들이지 않는다.
이 때문에 테러와 보복의 악순환을 자초하는 부조리한 상황이 지배하고 있다.
물론 샤론 총리는 철저한 전략적 계산을 따르고 있다.
팔레스타인 난민 학살 전과가 있는 그가 2000년 9월 예루살렘 회교 성지에 일부러 발을 디뎌 팔레스타인의 저항운동을 다시 촉발한 것부터 ‘땅 대신 평화’를 다짐한 오슬로 평화 협정을 무효화하고, 점령지 정착촌 등 기득권을 고수하려는 의도다.
아라파트 제거까지 떠들지만, 수십 년 숙적(宿敵)이 사라지면 자신의 존재 가치도 훼손될 것을 알고 있다.
핍박받는 아라파트도 노회한 계산을 하고 있다.
이스라엘 탱크가 봉쇄한 건물에 연금된 처지지만 자신을 죽일 수 없고, 오히려 과격파의 자살폭탄 테러 때마다 샤론에 대한 국민 신뢰가 함께 날아 갈 것을 알고 있다.
스스로 테러를 지시하지는 않지만, 그 것이 샤론을 무너뜨릴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이렇듯 애꿎은 양민 희생을 딛고 진행되는 유혈 부조리극의 연출자는 외부에도 있다.
미국이 이스라엘뿐 아니라 아라파트의 무장조직 및 정보기관과은밀히 협력하고 지원한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 그런 미국이 사태를 방관하고, 뒤늦게 입을 연 부시 대통령이 모든 게 ‘테러와의 전쟁’이란 샤론의 넌센스를 뒷받침해 주는 연유가 있다.
대 테러전쟁의 다음 표적 삼은 이라크에 대한 압박과 아랍권의 지지 확보에 팔레스타인 사태는 겉으로 불리하지만 안으로는 도움된다.
위기가 한껏 고조된 다음 양쪽을 눌러 앉혀, 이 지역 분쟁과 평화가 미국의 손에 달렸음을 확인시키려는 속셈이라는 분석이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만, 평화를 바라는 양심의 호소는 계속 울린다.
하비에르 솔라나 EU 외교담당 집행위원은 분쟁과 대치에 젖은 샤론과 아라파트의 동반 퇴진을 촉구한다.
낡은 각본의 부조리 극을 되풀이 공연하는 이들에게 평화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막후 연출자 미국까지 겨냥한 것이다.
저명한 이스라엘 역사학자 로이벤 모스코비츠는 한층 준엄하다.
용서와 타협을 모르는 강퍅한 대치가 이스라엘을 타락시켰다고 개탄하는 그는 다음 세대에 적대와 비극을 물려주지 않으려면 오로지 앞날의 평화를 논란할 것을 촉구한다.
과거에 매달린 정치인들의 편협한 극우보수적 사고와 행태가 민족의 행보에 스스로 족쇄를 채우고 있다는 지적이다.
중동 사태를 구경하는 우리 사회도 귀담아 들을만한 충고다.
강병태 편집국 부국장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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