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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수필을 쓰다 / 선운사 좌판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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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수필을 쓰다 / 선운사 좌판 앞에서

입력
2002.04.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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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식은 선운사의 동백꽃을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이라고 노래했지만 꽃이 지는 걸 보겠다고 꽃을 찾는 사람은 없다.피는 걸 보겠다며 사람들은 특별히 선운사를 찾는다. 물론 나는 꽃에 관심이 없을 뿐더러, 꽃을 보겠다고 먼 길을 가는 것도 좋아하지도 않는다.

남편은 예전 선운사 동백이 피었을 때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 봄만 되면 선운사 동백을 보러 가자고 채근한다.

“딱 이맘때”라고 해서 가면 망울이 아직 여물지도 않았거나 시퍼런 잎새만 무성했다. 그러면 발길을 돌려 복분자술과 장어를 먹고 돌아왔다.

우리의 여행이란 늘 이런 식이다. 삶이 있는 ‘여행(Travel)’이 아니라 겉만 핥다 돌아오는 ‘관광(Tour)’이다.

드디어 몇년 만에 성공했다. 양지바른 쪽으로 고개를 내민 성질 급한 동백이 몇 송이쯤 피었을 때니까.

선운사에 갔던 것은 아마 한 달쯤 전이다. 비리비리한 동백꽃 몇 송이를 보고 그래도 만족한 마음으로 산책로를 따라 걷고 있었다.

참고로 나는 물건을 보면 “그렇지 않아도 사려고 했던 건데”라며 반기는 쇼핑광이자 “요새 몸이 영…”하며 각종 건강식품을 섭렵해 온 진정한 ‘보신(補身)’주의자다. 당연히 길 옆에 늘어선 거대한 보따리 장사의 행렬을 외면할 수 없었다.

구기자나 오미자, 각종 산나물, 그리고 정성스럽게 갈무리한 곶감이며 소라, 번데기, 쥐포까지. 그런데 구기자는 가벼운 선홍색 빛이 진하게 나는 것이 국산처럼 보이지 않았고, 곶감도 알이 굵고 번들번들 모양새가 중국산 같았다.

슬쩍슬쩍 쳐다보는 나의 눈길을 잽싸게 낚아챈 할머니는 “구기자 좋아” “산나물도 좀 들여가”라며 자꾸 말을 걸어왔다.

시니컬한 나의 동행은 한마디로 나의 눈빛을 꺾는데 성공했다. “저거 다 시장에서 다 사온 거야.”

“그럼 몸(어딘지는 모르겠다)에 좋다는 살구씨 기름이라도?” 그러나 나의 눈에는 홍화씨 기름보다 기름 틀을 받친 커다란 박스가 들어왔다.

박스에는 ‘살구씨, 중국 포장’이라는 영문 글자와 중국 간체가 써 있었다.

아저씨는 어찌나 천연덕스럽게 이 기름의 효능을 설명하는 지 “이거 국산이에요”라고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할머니 이 깨 국산이에요?” “응 깨는 중국산인데 볶기는 내가 볶았어.” 이렇게 말하는 할머니는 죄송한 말이지만 ‘귀엽다.’

순한 얼굴과 순박한 말투에 배반당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요거 남은 거 떨이 해 가.” “세 식구밖에 안 되는데요.” “양이 얼마나 된다고. 이거 좀 더 줄게.”

평소와 다르게 ‘인간적’ 되고 싶은 마음에 양이 넘치는 것을 사고 나면 조금 있다 그 아주머니의 좌판에는 또 다시 그만큼의 나물이 놓여 있었고 멀리서 보아도 그의 입은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덤 주고 비싸게 받는 인간적 거래보다 필요한 만큼만 살 수 있는 디지털 저울이 더 좋다.

이런 나를 두고 사람들은 “넌 왜 그렇게 꼬였냐”고 한다. 영 틀린 말은 아니다. 그래도 나는 돈 주고, 마음주고, 사기 당하는 것은 달갑지 않다.

박은주기자

jup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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